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후 아버지가 재혼을 하신다고 선언하셨다. 장모이신 외할머니을 위시해서 피가 펄펄 끓는 젊은 나이의 오빠들은 길길이 뛰었다. 금지옥엽 금싸라기 같은 내딸이 죽은지 얼마나된다고 그 무덤에 풀도 마르기전에 재혼이라니... 외할머니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집구석이 쑥대밭이 되었다. 나중엔 안 사실이지만 동네에서 제법 산다고 하는 사람의 두번째부인되는 권번 출신의 여자가 있었는데(할머니가 이xx댁네라고 호칭했던 분인데 그여자만 보면 가자미 눈을 뜨고 보셨다) 그 여자의 소개로 알게 된 예쁘장한 여자였다. 자고로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르는 법이고 늦바람에 무섭다더니 그해 여름도 채 못되서 아버지는 평생을 몸바쳐오신 역장의 자리를 과감하게 내 던지시고 퇴직금 400만환을 타 가지고 우리 가족과 결별을 하셨다. 그래도 막내인 어린 것이 맘에 걸리셨는지 어느날 오셔서 나를 데려 가시겠다고.. 외할머니께서는 마음이 쓰리셔도 사위의 얄미운 처사가 미워 그랬는지 순순히 나를 보내셨다. 아버지를 따라서 온 곳이 서울 돈암동 근처의 조선기와집이었다. 4.19 끝이라 밖에선 총소리가 흉흉해서 바깥 출입은 못하고 안에 갇혀 지내야만 했다. 그 당시 귀하던 알미늄으로 만든 소꿉장과 동화책 그리고 예쁜옷과 맛있는 음식.. 이쁜 새엄마의 비위맞춤이 좋기도 했지만 안에서 갇혀있는 생활도 지겨웠고 할머니와 오빠들이 있는 내집이 슬슬 그리워 지기 시작할 무렵, 할머니가 나를 데리러 오신 것이었다. 구세주를 만난것인양 할머니 품으로 와락 달려 들어 쫄래쫄래 할머니를 따라 집으로 오는데 그때의 교통 수단이라야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게 보통이었는데 그날은 할머니께서 볼일이 있으셨는지 수색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게 되었다. 수색역 앞 넓은 광장에 할머니가 잠깐 여기서 기다리라 하시곤 어디로 총총히 사라지셨다. 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여기저기 두리번 두리번... 아무리 기다려도 할머닌 오시지 않고 난 점점 조바심이 났다. 근처를 서성거리고 찾아 다니다가 다시 원위치에 와서 할머니를 기다렸다. 울까말까 망설이는데 저 멀리서 할머니가 한손에 커다란 봉다리를 들고 황급히 뛰어 오셨다. 정확히 기억 나진 않지만 꽈배기인가 도너츠인가? 그 당시 조금만 어슷하게 운명의 수레바퀴가 비켜갔다면 나는 아마 고아원행이 되었을지도 모를일이다. 그리고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렀다. 외할머니 여동생의 딸인 분이 계셨다. 이뿐이 아줌마라고... 간호대학을 나오셔서 수간호사로 근무하시다가 나중엔 조산원을 차리시고 아드님과 둘이 사신분이다. 그분의 남편되시는 분은 통신장교로 육이오때 행불이 되신후 남편 목숨 값 받아 먹기 싫다고 연금도 마다 하시고 유복자이다 시피 하신 아드님과 수절을하신 그런 분이셨다. 할머님 살아 계실땐 한번도 뵙지 못한 분인데.. 내가 결혼해서 살게된 봄내에 살고 계셔서 물어 물어 찾아 뵈었다. 그이모 하시는 말씀이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나를 자기의 양녀로 삼겠다고 할머니께 달라고 하셨단다. 그런데 할머니는 일언지하로 "걔는 나의 눈이고 귀이고 지팡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절대로 줄 수 가 없다" 아. 나는 다시 한번 소리 죽여 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 가족이란 힘들때 서로 부둥켜 안고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야 하는거야...." 모진 운명의 시간들이 나를 힘들게 했어도 핏줄의 끈끈함이 있었기에 그래도 나의 삶이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