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야기
남녀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영화를 볼때도 남자의 눈과 여자의 눈이 다르다는 걸 실감한 예가 있었으니,
하나는
<나쁜 남자>
여자를 폭력으로 길들이는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납치, 폭행, 여자의 순종, 자의로 위장되었지만 의지가 뿌리채 제거된 여자의 동행으로 끝 맺는 영화를 보면서 내내 저건 아닌데 싶었다. 그러다 어떤 남자가 영화 감상문에서 못된 여자는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남자의 눈엔 아직도 여자가 길들어야 할 대상으로 밖에 안보이나부다.
대상을 경멸하면 결코 사랑할 수 없음을 아직도 모르는지, 남자들은 ...일부 남자들이라고 해야겠지?...여자를 좋아하다가도 일단 같이 잤단 이유 하나만으로 상대를 폄하한다던가? 그러니까 사랑 불능이요 사랑맹이란 탄식을 듣지.
두번째
<밀애> ....어떤 여자가 시사회에서 보고 쓴 글을 읽은 건데(바로 아래 글), 같이 영화를 본 여자들은 대게 여자 주인공의 고통에 공감하고 자신의 욕망에 눈뜨고 충실하려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홀로서기를 하는 주인공에 박수를 보내는 반면, 남자들은 단순히 남편 외도에 복수하는 맞바람 정도로 밖에 해석 못하고 여자가 적극적으로 혼자 사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을 내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본론 : <밀애> - 슬픈 색스
남편과 아이와 더불어 평범하게 살던 미흔은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의 외도를 알고 무너진다. 속죄하는 남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시골로 내려와서 살면서도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며 무력하고도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던 그녀는 이웃 남자로부터 이상한 제의를 받는다. 서로 즐기되 어느 한쪽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순간 헤어진다는 게임이다.
절망의 늪에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게임에 참여한 미흔은 남자와의 밀애를 통해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남편도 아이도 심지어는 사랑하게 된 그 남자도 잃어버리고 혼자가 된다는 내용이다.
남편의 외도 => 아내의 절망 =>화해, 또는 파멸로 이어지는 뻔한 스토리의 영화지만 그 상투성을 뛰어 넘는 감동이 있었으니 이는 여주인공 김은진의 열연 덕분이다.
머리를 예리하게 쑤시고 드는 두통, 어른 거리고 어지러운 시선, 뭔가를 제대로 생각할 수도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실감나게 연기하는데 쉬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 줬던 절절한 표정연기를 다시 한번 보게 되어 즐거웠다.
내가 눈여겨 본 장면은 미흔이 게임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낯선 이웃 남자와 맨 처음 색스를 하는 장면이었다.
보통의 여자라면 상상도 못해봤을 남편 외의 남자와의 정사, 뭔가 뚜렷한 돌파구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결코 바람직한 방법도 아닌 걸 알면서도 절망감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듯한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하는 정사 장면은 미흔의 고통이 그대로 내게 전달되는 듯한 느낌이었고, 사랑의 행위를 저렇게 울면서 할 수도 있다는 걸 이 나이가 되도록 몰랐다는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 어쩔지.....
장난으로 시작한 게임이 마침내는 사랑으로 발전했지만 둘 사이에 남은 건 이별 밖에 없음을 알고 절망하면서 나누는 마지막 정사 장면에서도 둘의 고통이 온몸과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 순간, 배우 두 사람은 정말로 자신은 한점없이 깨끗이 증발시키고, 미흔과 인규가 되어 내일 없는 세상의 끝에서 마지막으로 나누는 사랑에 혼신을 바치는 것 같았다. 그 배우들, 어떻게 고통과 쾌락을 동시에 한 얼굴에 담아 낼 수 있는지...감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예술과 외설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극명하게 보여주었고.
물론 아쉬움도 있다.
둘의 만남을 지나치게 색스에 한정시킨 것 ..그래서 치졸한 복수극으로 오해하게 만든 것 ....
내가 읽은 원작에서 미흔은 남자의 섬세한 손놀림에서 위로를 받는다. 오랫동안 방치한 자기 자신을 추스리게 하고 다시 보살피게 해준 것은 남자와의 단순한 색스가 아니라 남자를 통해서 얻은 위로 때문이었다. 여자에겐 색스가 육체가 아니라 심리전이라는 걸 작가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첫 정사 후의 잡작스런 감정 변화도 다소 부자연스럽다. 심연으로 추락한 미흔의 절망감이 한번의 색스로 해소된 듯한 설정, 그리고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밝고 활기찬 표정으로의 빠른 전환과 색스에의 탐닉은 색스가 유일한 목표처럼 비춰져서 아쉬웠다.
전체적으로는 여자의 심리 변화를 아주 섬세하게 그리고 세세하게 표현한 수작이다.
또, 다른 말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게 9시 정도부터였다. 끝내기까지 무려 세시간이 걸렸는데,
그 사이, 수능이 끝난 딸아이가 스케이트장에 가려는데 장갑이 없어 같이 찾아 주느라 법석 떨고.
전화를 무려 5통 쯤 받고 ...몽땅 영양가 없는 전화들.
다 식어 버린 커피 다시 타느라 시간 보내고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와 메모 나누고 ....
늘상 느끼는 거지만,
주부들이 뭔가 열중해서 일을 하려면
집을 떠나야 한다.
널린 집안 일에 등돌리고 컴 앞에 앉는 일에도
배짱과 안면 몰수가 필요하고
끊임없이 오는 전화를 안받으면
나중에 집 비워두고 어디 갔었느냐는 질문을 받아야 하고,
일 좀 하려고 전화 안받았다고 하면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오해와 싸워야 한다.
해서 뭔가 집중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짐 싸들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갈데가 어디 있남?
기껏 가야 카페 아니면 PC 방이다.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