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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주부의 알.콩.달.콩//21.강원도의 힘


BY 꼬마주부 2000-09-22

21. 강원도의 힘

9월의 문턱에 들어서자마자 주부님들을 바쁘게 했던 '추석'도 어느덧 지나간 일이 되어버렸네요.
전 그 때 있었던 일을 쓰려고 해요.
저는 결혼한지 1년도 채 안되었지만, 아직까진(?) 결혼을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주부 중에 한 명이예요.
귀여운 신랑과 친정부모님 보다 더 자상하시고 좋으신 시부모님, 공주님을 얻은 듯 친절하게만 대해주시는 시댁 친척분들...
철 없고 살림엔 영 젬병인 제가 할아버지도 큰 아들이고 아버님도 큰 아들이고 신랑도 큰 아들인 이 집의 맏며느리로 살
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다 시댁 분들 때문이지요.
우리는 인천에 살지만, 작은 집과 시할머니는 강원도에서 사십니다.
우리는 추석에 결혼하고 첨으로 강원도에 인사드리러 갔어요.
그 전부터 가고 싶다는 제 말에도 시부모님은 "너희들 바쁜데 뭘 가냐, 다음에, 다음에 같이 가자."고 부모님만 다녀오시
고 계속 미루셨지요.
어렵기만 한 시댁 친지들이 사는 곳인데 뭘 그리 가고 싶냐고 물으시겠지만, 사실 강원도에 가보고 싶은 이유는 신랑의 엄
청난 자랑의 힘이 크지요.
"할머니 사시는 동네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 너 동해바다가 깨끗하고 멋있기로 유명한 건 다 알지? 동네 근처가 다 바
다야. 인천? 월미도 앞바다 하고는 비교도 안돼. 어렸을 때 할머니네 놀러가면, 그 앞이 바로 바다니까 다 벗고 뛰어가고
얼마나 재미있었다구. 그리고 산이 또 죽이는 거 알지? 울창한 산들이 넘실 넘실, 공기는 또 얼마나 맑고 상쾌한데. 집들
도 얼마나 좋은데, 다 새로 지어서 아파트보다 훨씬 좋아. 그리고 설악산 밑에 오색 약수터 알지? 거기서는 또 다른 작은
아버지가 버섯 재배도 하신다. 아주 크게. 가고 싶지?"
저는 강원도라고는 고작해야 고2때 설악산으로 수학 여행 갔던 것이 전부라서 신랑의 말만 듣고는 가고 싶어 몸이 달아
있었어요.
출발 했지요. 새벽 3시 30에 출발해서 청평 쯤 가니까 동이 트데요? 잠이 들었어요. 신랑이 마구마구 깨우길래 일어났
더니 세상에....어디서 나타났는지 주위가 온통 산인거예요. 짙초록의 높은 산들과 경쾌한 계곡들...동네에서 보던 그 멀뚱한
산들하고는 차원이 달랐어요. 마치 신선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탁 트인 주변이 단숨에 맘에 들었어요.
신랑은 옛생각에 신이 나서 말하더군요. "어때? 입구에 들어서기만 했는데도 좋지? 이제 거의 다 왔어. 가면 할머니도
계시고 작은 집 식구들도 있고 고모도 계시고 작은 할아버지도 계시고....많은 친척분들이 계시지. 인사드릴러 다니려면 힘깨나
빠지겠다. 내가 장손이지 않냐. 그러다 보니까 가면 나는 그대로 오냐오냐,야. 내가 또 어렸을 땐 한 인물했잖아. 얼마나
예뻤다구. 그러니까 할머니는 나만 가면 다른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어. 동생? 걔는 맨날 찬밥이었어. 할머니한테 큰
손자는 왕자님이나 마찬가지였다구." 신랑은 곧잘 말하던 자신의 옛 활약상을 자랑스럽게 얘기했어요. 전 그런가 보다 했
지요.
작은 집에 도착했어요. 시할머니는 벌써부터 집 앞에서 저흴 기다리고 계셨어요.
신랑은 너무나 즐겁게 차에서 내려 할머니께 인사했어요. "할머니~~"
저도 뒤따라 내려 반갑게 인사했지요. 그러자 할머니는 신랑은 쳐다보지도 않고 저를 얼싸 안으시며 "오느라 힘들었지?
잘왔다. 잘왔어. 힘든데 어찌 왔누..."하셨어요. 신랑은 예상치 못한 일에 놀랐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봐요. 할머
니는 집안에 들어갈 때도 제 손을 꼭 잡으시곤 놓지 않으셨어요.
신랑은 삐졌어요. 생전 질투라곤 할 줄 모르는 신랑은 정말 삐졌어요.
"할머니! 왜 저 인사는 받지도 않으세요? 제가 먼저 인사했는데..왜 손주며느리만 쳐다 보세요? 그러실 수 있어요?"
할머니는 그냥 웃으시고는 또 저만 쳐다보며 다독다독 해주셨지요.
신랑이 정말 섭섭했나봐요.
집에 오면서도 내내 그 얘기만 해요. "치, 너만 끌어안고. 왜 너만 좋아하시지? 난 이제 눈에 안들어 오시나? 맨날
나만 좋아하셨었는데..." 그래서 한 마디 했죠.
"이 사람아, 당연히 내가 예쁘니까 그렇지. 이제 당신의 시대는 갔어. 시댁에서 권력층에 오른 건 나야. 내가 공주야.
당신은 이제 권력을 잃은...음...힘없는 왕자! 헤헤."

시 할머니께 신랑 보다 더 사랑을 받은 추석날, 강원도는 참 아름다웠어요.
시간이 없어서 둘러 보진 못했지만, 둘러 보지 않아도 강원도는 참 아름다웠어요.
시할머니 사랑처럼 울창하고 높은 산들과 친지분들의 친절처럼 넓은 바다와 신랑처럼 맑고 시원한 공기가 정말 아름다웠어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