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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버섯과 우리 할매


BY dansaem 2002-09-05

열흘이 넘도록 그치지 않고 쏟아진 비,
많은 사람들에게 씻어버리기 힘든 상처를 주고 간 태풍 루사.

한 쪽에선 물 난리를 겪어 그야말로 난리통이지만
그 비 덕을 보고 있는 곳도 있다.

이 무렵의 충분한 비는 송이버섯의 생육에 도움을 준다.
뉴스에서도 보도했지만
올해는 송이가 많이 나고 따라서 값도 낮아질 것이라 한다.

우리 친정 부모님도 송이를 채취하신다.
벌써 조금씩 나오고 있다 한다.
이제 한달 혹은 좀 더 길어질지 모르지만
당분간은 산에서 살다시피 할 것이다.

새벽 어둠을 헤치고 아버지가 먼저 산에 올라가시면
엄마는 계사를 둘러보고 나서 점심과 새참거리를 챙겨
뒤늦게 산에 가신다.
그러면 또 어두워져서야 내려오실테지.
송이가 한물이면 아예 산에 움막을 치고
거기서 잠까지 주무신다.
재밌는 건 우리 산에 해마다 움막을 치는 곳이
산소 옆이라는 것이다.
산마루에 평평한 곳을 찾다보니...

"엄마, 여기서 자면 안 무섭나?"
"무섭긴 뭐가 무서워."

높고도 넓은 그 산을 다 헤집으며
구석구석을 살펴 한 뿌리라도 찾아내려
발이 부르트도록 산을 헤매신다.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그 물집이 터져 쓰리고 아파도
진물이 나 양말이 들어붙어도
쉴 수가 없다.
두 분이서 그 넓은 산을 다 지키려니...

송이 철이 되면
송이 도둑이 또 그리도 기승을 부린다.
한 동네에서도 훔치고
사돈간에도 훔치고
산 너머 마을에서도, 아랫동네, 윗동네에서도...
산이라는 것이 담을 쳐 놓은 것도 아니고
금을 그어놓은 것도 아니니
옆산 주인이 와서 따가기도 한다.
송이에 이름을 써 놓은 것도 아니니
현장범이 아닌 이상 증거도 없다.

몇 해 전에는
산너머 마을에 사는 젊은 총각 하나가
현장에서 잡힌 적이 있다.
부자가 같이 하더라나?
우리 어릴 적엔 한 성질 하던 아버지였지만
남들에겐 모질게도, 아쉬운 소리도 못하는 성격인지라
젊은 사람에게 흠 남길까 혼 좀 내서 그냥 보냈다 한다.

어떤 때는 추석 명절을 제대로 쇠지 못 하기도 한다.
시사로 미루거나 혹은 서둘러 차례만 지내고는
아버지는 급히 산으로 가시곤 한다.
추석 며칠 뒤인 아버지 생신도 마찬가지.

송이산에 안 가본 지 십년은 된 거 같다.
힘들게 산마루에 올라서면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시원한지...
할매, 할배 따라 산 한바퀴 돌고 나서
휴대용 가스렌지에 냄비 얹어서
송이 찢어넣고 끓여 먹는 라면 맛도 기가 막혔다.

할매, 할배 계실 적엔
그래도 넷이 같이 일하시니 조금은 덜 힘드셨을까?
할매는 72세에, 할배는 다음 해 81세로 돌아가셨는데
두 분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산을 다니셨으니
그 연세에 참으로 근력이 대단하셨다.
아니, 근력이 아니더라도
자식들에게 마지막 남은 힘까지 보태주고 싶으셨겠지.

95년 가을,
한창 송이 따느라 바쁘던 때였다.
속이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 소리를 자주 하시던 할매는
늘 '뇌선'이라는 진통제를 달고 사셨다.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가 보라는 걸 한사코 마다하시고
그 해 가을도 산에 다니느라 진통제를 한꺼번에 두개씩 털어넣으셨다.
그러다가.......

위암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도저히 견디시지 못하는 할머니를
아버지와 고모들이 억지로 병원에 끌고 갔다.
한양대 병원까지 가 봤지만
이미 퍼질대로 퍼진 암세포는 어찌 손 쓸 방법이 없었다.

아무 것도 드시지 못했다.
위에 좋다고 생감자를 갈아 드시기도 했지만
그나마 속에서 받는다는 것은
장뇌삼 뿐이었다.
평생을 고생 고생하신 할머니인지라
아버지와 삼촌, 고모들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마지막 효도를 다 하려는 듯
수백만원어치의 장뇌삼을 사다나르로
원대로 굿도 걸판지게 했다.

우리 아버지,
굿이나 점 같은 건 절대로 믿지 않는 분이신데
할매 마지막 소원을 위해서
용하다는 무당 찾아 굿판을 벌인 것이다.
큰 고모는 그 날 밤 병원으로 오셔서는 이야기를 전하셨다.

"어매, 이제 걱정 마시게.
내내 @@(우리 아버지)이 풀리기만 빌었네.
이젠 걱정 마시게. @@이 잘 될 걸세.
걱정마시게."
흐뭇한 웃음 지으시던 할매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도맞재 골로 올라가 OOO골로 들어가 오른손 쪽으로 어디어디 가면
내가 묻어놓은 송이밭이 있다."
"어디 어디로 돌아 응달진 XX로 가면 거기도 열댓개 묻어놓은 게 있다."
"우리 산 왼쪽 구릉으로 돌아 얼마쯤 가면 서너개 올라오는 걸 봐 놨다."

울 할매, 병원에 누워서도
바쁜 시간 쪼개 찾아온 아버지한테
이렇게 시시콜콜 일러주셨다.
그 송이 따러다니시며 눈물 훔치셨을 아버지,
"어매가 일러준 대로 찾아가니 영락없이 송이밭이더라"
시며 지금도 가끔 그 때 일을 생각하며 눈시울 붉히신다.

살아 계실 때 종종 말씀 하셨었다.

"낭중에 내 아프거든 절대로 삼 멕이지 마라.
삼 먹으면 죽을 때 글쿠러 심 씬단다.(그렇게 힘이 든단다)"

그러시던 분이
선택의 여지 없이 장뇌삼을 드셨으니
돌아가실 때는 의식을 놓은 채로 사흘을 삐치셨다.
왼쪽 반신은 풍을 맞아 힘도 못 쓰고
유언 한 마디 없이 가셨다.
직장 다닌다고 그나마도 지켜드리지 못하고
내가 갔을 땐 이미 병풍뒤에서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올만 보여주셨다.

가끔씩 내가
머리 빗겨서 까만 고무줄로 묶은 뒤
세 갈래로 나눠서 땋아주면
찌그러진 알루미늄 비녀로 곱게 쪽을 찌셨다.
그러면 나는 "우리 할매,이쁘다."하며 장난을 걸곤 했는데
할매는 "예이,요년! 할매를 놀려?"하며 웃으셨다.

또 송이철이다.
엄마, 아부지는 딸, 사위 먹이고 싶어
놀러오라고 전화통에 불이 나게 전화를 하실 테지.
그럼 못 이기는 척 하고 가서
실컷 먹어 주고 오면 된다.
그게 낙이시니.......
나쁜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