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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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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것이 좋은 것이여


BY 잔 다르크 2001-05-30



 "혜경이다, 사거리 신호등 있는 데 서 있거래이!
영화는 저그 집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파트 담장을 두른 쇠창살을 숨기기라도 할 듯
빨간 줄장미가 늦은 봄볕에 한껏 팔을 벌리곤
함박웃음을 띄고 있었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휘 내젓는 모양새가 흡사
"가시나무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울수 있어요."
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여고시절이었던가? 2.28 탑이 있었던 명덕 로터리에서
향교와 앞산 쪽으론 고급주택가가 즐비했었다.
자박자박 친구들과 소곤대며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향하던 이맘 때쯤,
담장의 목이 부러져라 이고 있던 줄장미에 너도나도
코를 벌름거리며 쪼르르 달려가 발걸음을 멈추곤 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빛깔과 자태는 매 한가지건만
긴긴 아파트 둘레를 힘겨워하는 모습이
추억속의 가분수 담장보다
더 안스럽다.

"빵빵!"
한 번 씩 넋을 놓는 버릇이 있어
또 온 동네를 시끄럽게 만든다.

"우예 시간을 냈노? 괘않~나? 입시생이 둘이민서!"
서로의 답답한 마음을 터놓으며 중간에서 영화를 태웠다.
"니는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시상에 그 연세에 무신 스테미너가 고래 돌아갈 끼 있노?"
"ㅎㅎㅎ 오데 갈끼고? 올도 담북장 무로 갈래?"

한참을 달려 자갈이 깔린 허름한 한옥 마당을 들어서면
올망졸망 화분들이 놓여있고
쿰쿰한 냄새가 우릴 반긴다.
밀폐된 아파트에선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먹을 엄두를 못 낸다는 말은 들었지만
여기선 담북장도 마음놓고 퍼질러 사나보다.

양이 하도 적어져서 밥 반 공기를 겨우 먹는데
담북장만 있으면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니
내 위장의 심리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릴 적, 삼 동 추운 겨울만 들어서면
쇠죽 끓이는 가마솥에
가을걷이로 거두어들인  흰콩을 푹 삶는다.
싸늘하게 식기를 기다려 삼베보자기에 둘둘 말아
뜨듯한 아랫목에 놓고
헌 이불을 뒤집어 씌워 수일을 기다린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 하면
찐득하니 진이 잘 났는가 주걱으로 뒤집어 보고,
다 됐다 싶으면
굵은 소금을 뿌려가며 디딜방아에 대충 찧어선
장독대 한 켠에 두고 긴긴 겨울을 났다.

귀한 단백질인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던 그 맛이 무지 좋았다.

친정 어머니는 서울 한 복판 아파트에서도 잘 만드시길래
일러주신대로 해 봐도 실패만 되풀이 하니
콩이 눈이 달렸는 지? 아예 포기를 하곤
시장에서 사 가지고 와서 끓여 먹어봐도
영 아니다.

그런데 이 집은 친정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셨던 
바로 그 맛이다.
아마도 주인 할머니의 주름진 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신선한 야채반찬과 곁들여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섞다보니
어느새 밥 한 그릇을 거뜬히 비워낸다.

그 모습이 기특한지 둘 다 입을 헤 벌리고 쳐다본다.
밥 안 들어간다고 노상 징징대던 게
거짓말이라도 한 것인냥 머쓱하니 쑥스럽다.
싼 값에 건강식에 묵은 친구에...

"참말로 옛 것이 좋은 것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