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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17) -- 취직 그리고 ...


BY ps 2002-08-14

주윗 분들의 도움으로 여섯달 걸린다던 이민수속이 세달로 짧아져서,
생각보다 신혼생활이 일찍 시작됐지만,
새색시 순이의 미국생활은 처음부터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4년 반 이상의 이민생활이 힘드셨는지, 어머니는 별 이유 없이
앓아누우시는 게 다반사였고, 일이 꼬이다보니, 바로 밑의 여동생이
부모가 결사 반대하는 남자와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뜨거워지는 바람에
집안은 항상 우울한 분위기였다.

4학년 막바지 공부로 새벽에 나가 밤 늦게야 집에 돌아오던 나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들로 순이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득했다.
주말에 짬짬이 시간내어 바깥구경을 시켜주려 노력은 했지만...

의사공부는 포기했지만 석사공부까지는 했으면 하시는 부모님의 뜻과,
순이와의 결혼전 약속대로 대학원에 진학하려던 계획도,
결혼하여 행복하게 해주겠다던 약속과 맞물려 나를 힘들게 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졸업 후에나 결혼을 하는 건데...'
하지만 이미 떠나온 길...돌아갈 수도 없었고,
나의 능력없음을 탓하기만 하던 어느날...
자기 위해 거울 앞에서 화장을 지우던 순이의 얼굴에 불긋불긋한 '열꽃'이
몇개 생긴 것을 보는 순간, 마음이 확고해졌다.

"순이야! 대학원 공부는 직장에 다니면서도 할 수 있으니,
졸업하는대로 취직을 해야겠다!"

거울을 통해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만 보는 순이의 얼굴에서
조그만 희망을 본 듯했다.

다음 날부터 취업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졸업생들 상대로 학교내에 계획이 짜여져있는 큰 회사들의 인터뷰도
신청하고,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도 준비했다.
인터뷰 요령이 적힌 책도 읽고, 순이는 그녀대로 내 이력서를
타이핑하여 우편으로 보내고.....

하지만 실패의 연속이였다.
짧은 영어로 교내에서 했던 취업 인터뷰의 결과는
대부분 백인학생들에게 우호적이였고,
우편으로 보낸 90여통의 이력서 중 1/4 가량은 답장이 왔으나,
'경험이 없어서' 쓸 수가 없다는 정중한 거절의 편지였다.
나머지는 그저 함흥차사.....

힘든 이민생활에 공부를 끝내는 것도 대단한 일이라 생각이 됐는데,
언제, 어디서, 경험을??

주위에선 '2차 중동 오일 쇼크'로 불경기가 심하니,
대학원에 우선 진학하고, 2, 3년 후를 노리라고 충고를 했고,
지쳐가던 나도 별 도리가 없어 대학원 진학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어느 주말 저녁, 모처럼 순이와 둘만의 외식을 나갔으나,
일이 생각대로 안 풀린 우리 둘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미안해! 행복하게 해준다고 약속했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괜찮아! 노력은 했잖아... 내가 조금 더 고생하지 뭐....."

"......."


그로부터 며칠 후,
L.A.에서 동쪽으로 80키로 정도 떨어진 Riverside에 있는
조그만 항공회사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항공기 부품에 쓰이는 신소재 플라스틱을 연구하는 자리였는데,
인연이 있었던지, 열흘만에 편지가 왔다.
'와서 일해달라고!'

졸업을 2주 앞 둔 때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졸업식을 끝내고,
3주 동안 준비하여 집을 떠나던 날...
새 생활에 대한 기대로 들떠있던 순이와는 달리,
어머니는 하루종일 기운이 없어 보이셨다.
아직도 어렸던(?) 나는,
"어머니, 어디 아프세요?"하고 철없이 굴었고,
어머니는,
"아니... 어제 저녁 먹은 게 조금 체했나보다."라며 넘기셨다.

"멀지 않으니까 자주 들리겠습니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떠나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한 어머니의 얼굴과
활짝 핀 순이의 얼굴이 묘하게 대조되었고,
그때서야 나는 어머니가 <체하신> 이유를 깨달았다.


*****

어머니!!
가끔 섭섭하실 때도 있겠지만,
저는 여전히 어머니의 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