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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중학교 시절


BY Lucky mom 2001-05-23

나보다 키가 20cm나 훌쩍 큰 아들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길을 걸어 간다.
정보 올림피아드 2차 예선 실기시험을 치르러 가는 길이다.
이런저런 이야기하기를 즐기는 아들은 끊임없이 조잘거린다.
기근으로 북한사람들이 22만 명이나 굶어 죽었다는데 이런 것을 발표하여 북한에게 뭐가 이익돼요?
우리학교 미술 선생님은 1m 98cm의 거구이신데 필살기로 아이들 뺨을 따다닥 때리시는 게 장기이시고 며칠 전에는 우리 반 한 친구가 필살기를 맞고 뻗어 버려서 선생님이 깜짝 놀라 양호실에 데려 가셨어요.
아이들이 미술실 팻말을 마술실로 바꾸어 놓았고 컴퓨터에 미술 선생님이 월트 디즈니에 나오는 마술사의 모자를 쓴 모습을 띄워 놓았는데 선생님들이 I.D 추적을 통해 범인을 찾으려 했지만 PC방에서 한 것이라 찾지 못했고 미술 선생님은 무지 열받았어요.
이번에 가게 될 현장학습지인 오대산에서 케이블 카를 탈 텐데 같이 가는 옆 반은 무서워서 안탄다는 얘가 16명이나 되지만 우리 반은 담임 선생님께서 단결심을 보여야한다고 해서 전원이 다 타기로 했어요.
그 외에도 여러가지 연예인 소식...등등 끝없이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 표정이 무척 밝고 깨끗하고 긍정적이다.

중1. 귀여운 까까머리에 풋풋해 보이는 피부와 군살없이 쭉 뻗은 큰 키는 이제 막 프르름을 자랑하려는 나뭇잎들의 새순처럼 싱그럽다.

양손에 샤프 한 자루와 볼펜 한 자루씩밖에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집으로부터 한참 걸어온 후에 알았다. 깜짝 놀라 그것만 가져가느냐고 묻는 나에게 "본래 그런 거에요."라고 덤덤하게 대꾸한다. 그럼 위 포켓에 그것들을 꽂고 가자니까 그냥 그렇게 들고 가겠단다.
조금은 큰 시험이니까 저도 긴장이 되는 모양이다. 집을 나서기 직전 후다닥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 가더니 지금은 양손에 쥔 필기도구들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해서 만지작거리고 있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한다. "왜, 배 아프니?" "연필 그렇게 돌려대지 마." 이런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꿀꺽 삼켜 버린다. 그런 관심표현은 아이를 더 피곤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자기자신의 힘으로 잘 해낼 것이기 때문이다.

5월 중순, 쏟아지는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과 아파트 단지 안 잘 가꾸어져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고 지금 막 곁가지들을 잘라 낸 쥐똥나무 울타리들의 말끔하게 다듬어진 모습과 풍겨 나오는 상큼한 풀냄새를 맡으며 아들의 말을 심각하게 듣기도 하고 건성건성 흘려 듣기도 하고 같이 웃기도 하고 그러면 안된다고 가볍게 나무라기도 하면서 무심히 걷다 보니 목적지인 영도 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아들은 4층 컴퓨터실을 찾아 필기도구만 두 자루 달랑 갖춘 몸으로 손 한 번 쓰윽
흔들어 보이고는 당당하게 고사장으로 들어가 버린다. 복도 여기저기 함께 따라온 학부모들과 학원 선생님들이 무리지어 서 있다. 자기 아이들의 뒷모습을 잠깐이라도 더 보기위해 닫혀진 문 앞에서도 눈길을 돌리지 못한다. 나도 그 중의 한 명이다.

계단을 내려와 하릴없이 운동장을 서성거리다가 발소리를 죽이고 다시 올라가 보니 출입문에 조그맣게 하나 붙어 있는 유리창을 통해 아들의 귀여운 머리통과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는 진지한 눈빛이 보인다. 제법 자신있게 문제에 도전하고 있는 모습이다.의젓하고 또랑또랑해 보인다. 내마음이 따뜻해진다.
다시 학교 운동장으로 내려와 느티나무 아래 한가롭게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황홀한 5월의 자연을 만끽한다.

내가 중1이었던 때가 생각난다.
어려운 경쟁을 뚫고 합격했던 지방의 명문여중.
부모 형제들와 학교 담임 선생님의 기쁨과 자랑이 되었던 나의 합격.
수업시간마다 들려 주시는 각 과목 담당 선생님들의 여러가지 교훈과 긍지를 심어주는 말씀들은 이제 막 철들기 시작하는 사춘기의 우리들이 긍정적인 자아관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간혹 단체로 운동장에서 토끼뜀을 하는 정도 이외의 체벌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한창 예민했었을 우리들의 자존심과 인격을 존중해 주었던 모교의 그 풍토가 참 귀하고 고맙게 여겨진다.

수많은 책이 완전 개가식으로 진열되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던 도서실,부산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던 4층 음악실과 그 곳에 우뚝 자리잡고 서 있던 검은 피아노. 부루마라는 불룩한 팬티모양의 반바지 체육복을 입고 멋쟁이 여선생님으로부터 갖가지 미용체조를 익히던 넓은 강당마루. 지금으로서는 흔한 것들이 되어 버렸지만 그 때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온갖 조리기구들과 개수대와 프로판 가스 시설이 갖추어져 있던 가정 실습실.지하실 컴컴한 곳,알코올에 잠긴 태아와 여러가지 생물들이 길고 둥근 유리병에 담겨 죽 늘어서 있던 서늘한 과학실. 문을 열면 훅하고 흙냄새가 풍겨 나오던 학교 뒤뜰의 온실과 그 속에 있던 희귀한 식물들과 환한 햇살. 2박3일 보따리 싸들고 들어가 10명의 친구들이 한복입고 한 식구가 되어 생활하던 생활관.

그 따뜻했던 평화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아련한 넉넉함이 차 오른다. 60년대 후반의 가난했던 시절에 지나왔던 내 중학생활은 여러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과 보살핌 속에서 많은 혜택을 누리며 아무 걱정없이 밝은 햇살 속을 걸어 온 시간들로 기억된다.

나의 아이들도 다음에 어른이 되어서 자신들의 중학생활을 이렇게 회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추억은 가끔은 견딜 수 없도록 춥고 쓸쓸하기도 한 자기의 온 삶을 있는 그대로 끌어 안고 사랑할 수 있게도 해 주는 귀중한 자양분이 되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