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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여성의 시험관 시술로 임신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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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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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이유


BY my꽃뜨락 2001-05-13


그 날은 그랬다.
쪽빛으로 반짝이는 푸른 바다는 에머랄드를 깔아놓은 듯 눈이 부셨고, 섬마을 특유의 상큼하고 비릿한 갯내음은 첫발을 막 디딘 나그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봄방학에 맞춰 ?은 거문도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수산물 중개업을 하는 남편 친구는 탯자리가 원래 거문도였다. 마냥 사람 좋은 그이는 낯선 여자 셋을 맞아 어떻게 하면 맛있는 음식 ?아먹이고 좋은 곳 구경시킬까 고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햇빛과 바람과 물살에 반짝이는 모래밭!
꽃보다 더 아름다운 동백 이파리가 두 팔 벌려 활짝 반기는 곳!
맑고 향기로운 그 섬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되어 힘겹게 병마와 싸우는 나를 따스하게 맞아주었다.

만신창이! 그래,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유방암 수술로 한 쪽 가슴은 없어지고, 연이어 자궁에 난소까지 들어낸 나는 이미 여자가 아니었다.
허망함을 얘기하기 전에 나는 살아난 것에 안도하고 감사하는 절박한 상황이었고, 남편은 그런 나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며 좋다는 것은 천지를 뒤져서라도 구해 먹였다.

극진한 남편의 사랑으로 나는 남들이 감탄할 정도로 씩씩하게 투병생활을 할 수 있었고 마음의 평화(?)도 웬만큼 ?을 수 있었다.
없어진 가슴 탓에 난생 처음으로 무지하게 비싼, 거금 22만원을 주고 미제 브레지어를 마련했다.
그러나 실리콘으로 가슴모양을 만든 브레지어는 너무 무거워 나는 그 고가품을 모셔만 놓은 채, 곧잘 벙벙한 점퍼스타일로 찌그러진 가슴을 감추고 나돌아 다녔다.
남들이 다 겪는다는 폐경기 우울증도 내게는 없었다. 오히려 달마다 나를 귀찮게 했던 행사가 없어져 홀가분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나는 천하태평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세워진 4칸짜리 미니초등학교는 방학을 맞아 고즈넉했다.
그 학교 학부모회장이라는 남편친구가 맨처음 데려간 그 곳은 그대로 동화나라의 학교종이 땡!땡!땡'이었다.
구령대 위에는 정말로 학교종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화단에는 붉은 동백꽃이 농염한 모습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한쪽 켠엔 수선이 귀여운 병아리처럼 옹기종기 모여 재재대고 그 옆엔 이름모를 화초와 싱싱함을 맘껏 뽐내는 상록수들이 열병한 채 차렷자세로 우리를 맞았다.

전교생 27명!
가족과 떨어져 2년째 섬마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선생님은 불시에 들이닥친 우리 세여자를 십년지기처럼 환대했다.
후배 하나는 학원 원장이고 또 한명은 전직 교사이니, 오죽 궁합이 잘 맞을까?
교무실 책상 위에 급조한 상차림이 마련됐다.
살짝 얼린 숭어회를 잘 익은 김장김치로 싸먹는 맛이란!!!
바다에서 막 잡아올린 생선회는 종류 불문하고 뭐든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내 처지를 잘 아는 친구부부는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 눈물겹게 애를 써줬다.
싱싱한 생선회에 매운탕까지.. 저녁을 근사하게 때운 우리들은 전자올겐을 치는 악사까지 있는, 제법 괜찮은 단란주점으로 직행했다.

겉보기엔 퉁퉁한 얼굴에 지극히 평범한 사십중반의 아저씨같은 선생님은, 그러나 반주가 시작되자 매력만점의 소리꾼으로 돌변했다.
존재의 이유!
장안의 여성들 가슴깨나 흔들어 놓았다는 인기폭발의 그 유행가 말이다.

언젠가는 너와 함께 하겠지
지금은 헤어져 있어도

***

니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니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네게 달려 갈테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니

가슴을 파고드는 애절한 노랫말! 그 애절함을 더욱 절절하게 만드는 목소리에 우리 셋은 반쯤 넋이 나가버렸다.
맥주 몇 병에 취해버린 후배는
"I Love You! I Love You!"를 외치며 선생님을 따라다니는 촌극을 벌였고 모두들 춤과 노래에 취해 정신이 없었다.
노래는 웬만큼 하지만 춤은 전혀 출줄 모르는 나는 한쪽 켠에 쥬스를 마시며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가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같이 춤춰요."
"저는 춤 못춰요.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니까 걱정 마세요."
"누구는 잘 추나 뭐? 따라오기만 하면 돼요."
억지로 잡아끌려 일어난 나를 그가 가만히 품에 안았다. 어린 아이 안 듯 그렇게...

"소녀 같아요."
"키가 작아서 그렇게 보이나 봐요."
싱겁게 말을 받는 나를 귀엽다는 듯, 싱긋 웃으며 볼을 톡 친다.
"만나서 너무 좋았어요. 그래도 괜찮죠?"
"잘 모르겠는데요?"
"섬은.. 어떤 땐 너무 외로워요. 아이들은 예쁘지만 엄마들 관심이 유난스러워 조심스럽고 불편할 때가 많지요."
"그렇겠네요. 가족들과 떨어져 사시니까 힘드시겠어요?"
"우리 마누라는 한갖지고 편하다던데요? 후후!"
"그런데 이런 모습이 트레이드 마큽니까?"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다른 여자들과는 많이 다른가 보았다.
작은 키에 점퍼 차림! 게다가 단발머리에 화장기없는 맨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녔으니까.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요. 또 볼 수 있을까요?"
"..."

가슴이 괜시리 아려왔다.
나는 마흔다섯이나 먹었는데.. 아주 많이 사랑하는 남편도 있는데, 그런데 이렇게 설레어도 괜찮은 걸까?

이틀을...
동백꽃 터널과 수선화, 갈매기가 어우러져 노래하는 등대 섬으로.. 쪽빛 바다가 넘실대는 방파제로 그렇게 싸돌아다니며 아름다운 섬! 거문도를 맘껏 가슴에 담았다.

'데모크라시' 친구부부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그 배에 오르면서도 나는 노래 잘 하고 낭만이 넘쳤던 섬마을 선생님이 기다릴 작별인사를 생략했다.
'좋아요'
빙긋 웃으며 나를 바라봤던 그 눈빛만 가슴에 간직하고...
존재의 이유!
그 아름다운 노랫말과 목소리만 깊이깊이 간직하고...



꽃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