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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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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은 보리피리를 분다


BY 잔 다르크 2001-05-05

길은 바다를 오른편에 두고 산자락에 겨우 기대어 있었다.
불조심 포스터라도 그린 듯
붉은 저녁놀이
검푸른 동해바다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차가 구부러진 길을 숨바꼭질할 적마다
저수지인냥 호수인냥 시치미를 뗀 바다가,
보이는가 싶다가 금방 사라졌다.
회가 먹고싶다고 바다가 보고싶다고 아무 생각없이 들락거리곤 했었다.

벌써 육년이다.
사고 후론 애써 외면하던 길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 오랜 투병생활, 쌍으로 찾아온 마음의 병,
선택한 게 아니라 어느 날 한순간에 안겨진다.
눈물이 고여 도랑이 되고 내를 이루더니 강이 된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마음의 벽은 단단한 성벽이 된다.

차는 어느새 강구라는 이정표를 뒤로 하고 쏜살같이 내달렸다.
높은 길에 올라서자
손만 내밀면 바닷물에 적셔 질만큼 나지막한 곳에
집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모습이 옹기종기 보였다.
갑자기 해일이라도 덥칠 듯한 안스러움이 엄습해왔다.

고달픈 사연는 귓등으로 스친다.
애?㉯?사연도 강 건너 불구경이다.
말만 하면 다 들어주는 든든한 빽이 있다.
밥은 저절로 입으로 들어가는 줄 안다.
약하고 아프다는 핑계로 보채고 어리광만 피운다.
그 등 뒤에 서면 나는 작아진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가 보이는가 싶더니
바다를 향한 언덕이 가로 막고 나섰다.
언덕 위 손바닥만한 짜투리 땅에
새파란 보리가 제 키에 겨워
짭짤한 해풍에 몸을 내 맡기고 있었다.

초봄의 어느 하루,
할아버지께서 언질을 주신다.
"보리를 밟아라."
얼어 트진 손을 주머니에 감추곤 막 올라오는 보리을 밟는다.
뽀드득 뽀드득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발밑에서 들린다.
칼바람을 이겨낸 뿌리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구나!
긴긴 밭고랑이 우리의 이야기 소리에 파뭍혀 한결 짧다.

좀 더 자세히 볼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병치레 하느라
새까맣게 타들어가던 깜부기도 섞여 있었을까?
목을 길게 빼고 돌아다 봤지만
기묘한 형상으로 제 그림자를 바다에 던진 바위만이
물결에 출렁이며 눈을 어지럽혔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고향이 그리워 필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어릴 때 그리워 필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의 거리/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필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눈물의 언덕을 지나 필 닐니리.”

기막힌 병이 들고서야
보리피리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 시인이 떠오른다.
온전히 나만의 몫으로 남겨진 외로운 싸움이다.
IMF 구조조정의 폭풍이 덧쒸워진다.
바람부는 데로 날려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내 나를 지어 뜯는다.
"끝이구나" 하곤 생명의 끈을 놓는다.
친구는 밤낮으로 전화를 해댄다.
내 존재를 확인하곤 안심을 한다.
온실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사시나무처럼 떤다.

적당히 바다와 떨어진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섰다.
금새 뽀얀 발이라도 담글만큼 바다는 지척이었다.
맞은 편엔 한걸음에도 오를 것같은 동그란 산이
주차장으로 마지막 산그늘을 두르고 있었다.
간간히 작은 배들이 보였다.

어느날 배짱이 생긴다.
그래 넘어야 할 산이 있다는 건 다행이다.
한치 앞을 볼 수없는 캄캄한 터널이지만,
오늘 하루만 생각하고 좀 모자란 듯 살자!
용기를 내어 두려움에 맞서기로 결심한다.
두려움은 곧 증발하고
걱정이나 곤욕도 생각보다 쉽다.
낮은 곳에서도,
사는 재미는 봄볕처럼 따사롭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주인의 감성적인 취향이 엿보이는,
사군자의 이름을 딴 방이름이 정겨웠다.
금방이라도 다시 바다로 들어갈 듯한 숭어회를 입안에 넣자
사르르 침이 돌며 목안으로 사그라들었다.
유달리 회를 좋아했던 가족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높은 장대 위엔 갈매기 한마리가
주고받는 정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 는 것이
무슨 말인 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사람은 자기가 행복하고 싶은 만큼 행복 해 질 수 있다" 는
링컨의 명언이 가슴에 와닿는다.
아! 정말로 나는 사랑스런 존재구나!
그래서 더욱 다른 사람도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오랫만에 즐기는 여유와 한가로움을 틈타
어둠이 슬며시 옆자리로 끼어 들었다.
멀리 등대가 깜빡이 것이 눈에 들어 왔다.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야 할 시간을 훌쩍 넘겼다.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살 수 있는 물고기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쉬지 않고 움직인다.
결과에 메달리지 않고 노력하는 내가 좋다.
우선 저질러 놓고 본다.
수습하러 다닌다고 분주하다.
나약하고 안주 할 때의 나보다,
바람 앞에 놓인 등불같은 현실을 돌파하고자,
동동거리는 내가 좋다.
오래오래 전, 패기 넘치던 나의 모습이다.

이제 순전히 나만의 목표가 된
절반의 여정만이 남았다.
선뜻 가마고 나섰던 속내는
어느듯 견고한 성이 되어버린 그 벽을
허물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은 밝을 때 지나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엇다.
바다 하늘 산이 혼연일체가 되어 오직 하나의 덩어리였다.
산등성이만이 꼬리를 문 자동차 불빛에 가는 선을 긋고 있었다.
생경했다.

타의와 자의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때를 돌이켜 본다.
저주라고 생각했던 고통들이 오히려 축복의 끈이 된다.
새로운 내 인생을 찾으라고
그렇게도 무서리가 내렸나보다!
말 그대로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은 당당한 아줌마다.
다른 사람에게 승자가 되라고 채근하지 않고 결국 내가 승자가 된 것이다.

도시와 도시를 갈라놓은 경계선을 넘자
밀린 숙제를 해치운 것같은 후련함이 전신을 훑었다.
샛노란 개나리처럼 환하게 웃음짓는 가로등이 정겹게 느껴졌다.
옹골진 벽은 그렇게 허물어졌고
우리의 마음엔 사랑의 꽃이 피었다.
따사로운 초봄의 하루였다.

“천형(天刑)의 문둥이가 되고 보니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계란 오히려 아름답고 한이 많다.
아랑곳없이 다 잊은 듯 산천초목과 인간의 애환이 다시금 아름다워
스스로 나의 통곡이 흐느껴진다” 라는 시인의 말을 되새기노라니
시가 한층 더 애절하게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