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염원정
포목점 여주인이 골라준 소복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간 그녀는,
알록달록한 빨간 꽃무늬 알로하 셔츠와
둔부를 꽉 조이고 있던 청바지를 벗고 노 브레지어 차림의 거울 속에서
유일하게 걸치고 있던 삼각 팬티를 허벅지 아래로 천천히 끌어내렸다.
그러자 고혹적이고도 달콤한 곡선으로 부풀어 있는 가슴과 아찔하게
현기증이 도는 절벽 아래로 질곡의 숲이 한눈에 들어왔다..
"흥, 이게 자기의 유일한 무덤이라고? 무덤이 헷갈렸겠네...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그녀는 거울 속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내뱉고 있었다.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있게 해줘서 행복하다고?
그것도 피라미드 꼭지점에서? - 후, 이젠, 다 부질없어 !
나만 사랑한다던 말에 영혼까지 줬던 내가 바보고 멍청이지!
기울어지고 기웃대고 목말라했던 세월이 아깝지만, 보란 듯이
죽어주지...
이젠 사랑도 미움도 미련도 없어!
내가 죽어서 아프게 해줄 거야. 영원히...
"왜, 옷이 잘 안 맞우?
탈의실 밖으로 새나간 그녀의 중얼거림이 옷 때문인 줄 알았는지
그녀의 혼잣말에 여주인이 끼어 들었다.
"대충 입고 나와봐요 내 봐 드릴께.
"아, 예.
그녀의 반사적으로 끌어내렸던 속옷을 추키고 치마 허리끈을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마치 마음 속 결심을 묶기라도 하듯
끈을 당겨 매듭을 매고 저고리를 걸쳤다.
"그래, 이젠 지워버리는 거야
"예?
그녀가 중얼거림에 또 여주인이 반응을 한다
"아, 아니예요. 이거 얼마예요?
"입고 가시려우?
"예.
안 그래도 어딘가에 예리한 칼날을 감춘 듯하던 그녀의
표정이 하얀 소복 탓인지 더욱 차갑고 싸늘해 보였다.
"에구, 댁은 소복도 참, 잘 어울리네 그려. 그런데...
"예?"
"그런데, 누가 돌아갔기에...
궁금했는지 계산을 치르는 그녀에게 여주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남편요.
답을 알고 있는 어린아이가 참지 못하고 내뱉듯이
짧고 간단하게 그녀는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에구머니나, 쯧쯧...
여주인은 괜한 걸 물어봐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혀를 찼지만,
오히려 그녀는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괜찮아요. 죽은 사람이 뭘 아나요? 산 사람이 더 고통이죠...
"하, 하지만...
"하지만?
예. 하지만, 빌어먹어도 이승이 좋다고 하잖수. 젊을 텐데 참, 안됐네...
그러자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돌아섰다.
아무 말 없이 그녀가 돌아서자 정 많아 보이는 주인은
문을 밀어주며 인사를 한다.
"안녕히 가슈!
'소복이 잘 어울린다니 참 다행이야...
여주인이 하는 인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녀가 또 엉뚱한 말을
중얼거리자 여주인은 그새 적응이 됐는지 허리를 굽혀 또 한마디
한다.
"다음에 또 와요.
다음에 또 오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가게문을 나서다 말고 그녀가
주인여자를 돌아보며 처음으로 씽긋 웃었다.
포목점을 나온 그녀는 언제까지 걸을 생각인지 벌써 몇 번째의 정거장을
그냥 지나쳐 걸으며
'주여, 이제 기다림에 얽매이지 않게 됐음을 축복해 주시고, 삶과 죽음, 만
남과 이별에 대한 혼돈과 미련을 털어 냄을 축복하여 주시고 그가 피운
바람을 타고 나를 멀리 날려보내소서....아멘.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을까. 그녀는 붉은 신호등이 켜졌는데도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있었다.
"끽!"
"악!"
소리와 소리가 동시에 맞물리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쓰러졌다. 그러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사고 난 곳으로 몰려들었고,
검은 프린스 자동차 문이 열리고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키가 자그마한
중년 남자가 내리더니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그녀의 상체를 반쯤 일으켜 안고
그녀의 몸 상태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알아달라는 듯
"내가 천천히 달렸으니 망정이지...
아니, 어쩌자고 차도에 뛰어들어요! 죽고 싶어요?
이봐요! 이봐요! 정신차리고. 말 좀 해봐요! 예?
그러자 그녀는 마치 그 운전자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소복은 이별이다. 이별은 지우는 것. 삶의 분리....으음...
분리...는 죽음. 잊혀지는 것. 그래 그래... 그래 그래...
그녀가 계속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목에 스프링이 달린 목각 인형처럼 고개만
끄덕거리자
"뭐라고 요? 눈 좀 뜨고 크게 좀 말해봐요 예?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운전자의 목소리가 한층 다급해졌다.
"어디가 아프다고 하는 것 같은데?
"거, 목도 이상한 것 같은데? 빨리 병원으로 가요!"
"에그머니나, 상중인 것 같은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저 여자가 잘 못했어 내가 봤는걸? "
"죽으려고 했나봐... 그렇지 않고서야 멀쩡하게 달리는 차에 뛰어들 수
있어?\"
"어디 크게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은데?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아..."
"멀쩡해 보여도 속은 골병든다니까? 병원에 가야지"
모두들 걸음을 멈추고 이렇다 저렇다 아는 소리를 던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후두둑...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금새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밀물처럼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비를 피해
눈 깜짝할 새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거센 빗줄기 때문인지 그녀가 큰 숨을 뱉어내며 눈을 뜨자
정신이 좀 들어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어디 다친 곳 없어요?\"
하고 운전자는 또 한차례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참 시원하네요."
"예?"
"비가 참 시원해요."
"허, 참..."
질문에 한참 빗나가는 답이었지만 운전자는 한결 마음이 놓인 기색이었다.
걸을 수 있어요? 이렇게 비를 맞다간 폐렴 걸리겠어요 어서 차에 타세요.
아픈 데 없어요?\"
"예... 그런데, 내 가방...."
갑자기 뭐가 생각나기라도 했는지 그녀가 급하게 가방을 찾았다. 그러자
운전자는 아까 와는 달리 푸념 투로
"어휴, 생사람 잡아도 유분수지. 아, 갑자기 차도로 뛰어들면 어떻게 해요!
속도를 안 냈으니 망정이지 아줌마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으휴......"
혼자서 한숨을 내리쉬었다 들이쉬었다 하면서 도로에 흩어져 있는
그녀의 짐을 주섬주섬 주워왔다.
그러자 그녀는 얼른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차에 올라타자마자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전대요! 옥상에 빨래....예? 걷으셨다 구요?
막내보고 누나 공부하는 독서실로 우산 갖다 주라고 해야하는데...예?
벌써 갔어요? .
그런데, 어머니... 정말정말 죄송한데요 다름이 아니라,
제 방 화장대 위에 보시면 흰 봉투... 있거든요? 그것 좀 어디 치워 놔 주세요.
그거, 절대로 보시면 안돼요..
휴....... "
전화를 거는 태도로 봐서는 조금 전 사고를 당한 사람 같지 않게 그녀는 팔팔
살아 있었다..
"미안해요 아저씨...그리고 병원은 안가도 될 것 같으니 가다가 세워주세요."
"정말 괜찮겠어요? 그래도, 혹시 나중에... 나중에라도 이상이 있으면 연락하세요.
보험처리가 되니까... 괜한 생떼 쓰는 사람도 많은데..."
"......"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예. 괜찮은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예. 정말 십년감수했습니다. "
"죄송합니다."
"제 잘못이 큰데 제가 알아서 해야죠. 걱정 마시고 어서 가세요.
그녀가 쇼핑 센터 앞에서 내릴 때
운전자는 그녀에게 명함 한 장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가볍게 거절했다.
쇼핑 센터 화장실에 들어간 그녀는
흘끔거리는 거울 속 물귀신에게 알로하 반 팔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히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복은 둘둘 말아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전화로 당부해두었던 어머니에게서 문제의 흰 봉투를 봉합 된 채 건네 받고는
"휴...."
서랍을 뒤져 초를 찾아 불을 붙이고는 빈깡통을 찾아 들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안으로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쓴 유서를 촛불 가까이 가져가다 말고
만약 그녀가 어젯밤의 계획대로 죽었다면 그 유서는 여지없이 남편과 식구들에게
읽혀졌을 내용을 펼쳐들었다.
"으휴..."
그녀는 글을 쓴 어제와는 전혀 다른 심정으로 봉투 속에서
그녀가 밤을 새워 쓴 그녀의 유서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장장 20장이나 되는 유서는 곳곳에 눈물로 얼룩진 자국과 볼펜 속 찌꺼기가 뭉쳐 있었고 미주알 고주알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의 내용과 아이 하나 씩 생길 때마다 이러쿵저러쿵 한 장 씩 혹은 두 장씩 아름다운 추억들로 빼곡하게 들어찬 글을 읽어 내려가다가 부모님, 형제들 대목으로 넘어가자 서러움이 복받쳤는지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간통죄로 잡혀 있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경찰서로 갔을 때
아직 초등생도 안된 아이 둘을 둔 30대 여자가 그녀의 남편에게 쓴 온갖 글들....-당신을 하루라도 못 보면 못살 것 같다- 는 등... 봄내 풀풀 날리는 달콤한 내용들이 적힌 일기장이나 유치한 편지 글 등을 들고 휑한 눈빛의 어떤 낯선 남자가 경찰서에 남편과 함게 앉아 있다가 불쑥 그녀에게 애기를 청하던... 내용으로 넘어가면서 그녀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아내의 불륜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잡기 위해 자기 아내를 심문해 캐냈다는, --- 모모 호텔의 방 번호와, 계획적으로 자기 아내에게 전화를 걸게 해 그녀의 남편과의 대화를 녹음까지 해 온 그 남자의 속은 시커먼 정도가 아니라 계획적인 것이었지만, 그녀는 간통죄로 경찰서에 붙잡혀 있는 남편을 위해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악에 받힌 듯한 한 남자와 합의를 하면서 느껴야 했던 심정을 토로한 대목에선 입술을 깨물었다.
"나쁜 놈, 한 번만 또 그래봐라! 그 땐 너 죽고 나 살기다 "하며 화장대 위에 놓인 사진 속, 한 남자를 향해 쏘아봤다.
죽을 결심을 한 마당에 독을 품으면 얼마나 품을 수 있을까.......
결국 그녀가 쓴 유서의 마지막 내용들 그것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한 여인의 용서와 자기 비하와 자아에 대한 상실감으로 흐르고 있었다.
"으이그, 병신! 죽긴 왜 죽어!"
그녀는 죽음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유서 내용을 읽으며 다른 사람 것인 듯 자기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바보처럼 화를 냈다.
그런데,
자기 글을 자기가 읽으면서 질질 짜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던 그녀가.
유서의 맨 마지막 장을 읽어 내려가다 '글자 하나'를 발견, 다시 읽어보았다.
" "
그리고...
그리고, 뒤로 자빠져 한동안 미친사람처럼 웃어댔다.
-유서-
사랑했던 당신....
이러쿵저러쿵.......
...............................
어쩌고저쩌고....
당신의 바람은 내게도 책임이 있지요. 하지만 나는
하루에도 수 십 번 수 백 번 살인을 해야 했습니다.
처음엔 당신을 그 다음엔 나를..,.
-중략-
이대로는 살아낼 자신이 없습니다.
이제 삶에 대한 아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내가 당신을 죽이는 내 방법입니다.
기쁨과 슬픔 고통과 아픔 그리고 지옥까지 당신에게 놓고 저는 갑니다.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나는 저 세상 사람일겁니다.
-----중 략--
그리고 마지막 부탁이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꼭 환장해주세요.
-****년 0*월 **일
-
-
한참을 정신없이 웃고 난 그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유서를 향해 혀를 널름거리고 있는
촛불을 꺼버리고 남편의 책상 위에 그녀가 쓴 유서를 올려놓으며 '화장'은 무슨???
"환장하겠지?"
"어머니, 저 여행좀 다녀올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