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 우리집에 터를 잡은 강아지는 끊임없이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개'에 대한 고정관념을 허물어 내었다.
'개만도 못한 놈!' '사위자식 개자식' '개새끼'…
개로 시작하는 모든 말이 점점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오직 하나, '개팔자 상팔자'라는 말 이외에는...
우리 집에 온 그 놈은 아무데나 오줌을 안 싸려고 외출나갈 때까지 참을 줄도 알았으며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도 게걸스럽게 덤비지를 않았다.
털 있는 동물에 주접스럽게 왜 옷을 입히나 비웃었더니 찬바람을 맞으면 와들와들 온 몸을 떨어댔으며 아무거나 먹고 소화 잘시키는 사람에게 비아냥대는 '개 소화력'이란 말도 이 놈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심지어 기름기 먹고 탈 날까봐 삼겹살 구워 기름은 내가 떼어먹고 살코기만 고 놈 입에 넣어주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나는 내가 알고 있던 개와 너무도 다른 귀족스러운 개에게 억울한 마음이었다. 지 분수에 맞지도 않은 호사를 떨고 있을 뿐 아니라 철부지 아이보다 더 영민하고 절제력도 갖춘 개새끼가 영 주제넘은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한 봉지에 1만원이나 하는 프랑스산 개밥도 싫어해서 그보다 비싼 통조림까지 섞어 먹이고 간식으로 준다고 아이들 것보다 더 비싼 개 과자를 살 때도 안 사면 그만인 것을 기어코 사면서도 기분만 개떡이었다.
아플까봐 안먹을까봐 노심초사 전전긍긍 물어보러 다니면서도 후렴구처럼 나는 그렇게 사람보다 개에게 뿅~간 얼간이가 아니라는 의미로 개 키우면서 짜증나는 억울한 일거리를 한사발씩 외우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못 먹고 못 입는, 심지어 해외까지 내다 팔리는 어린것들도 많은 이 땅에서 손바닥만한 개 옷을 몇 만원씩에 사 입히고 물고 빨고 하기에는 마냥 편안치만은 않은 원천적인 죄책감도 합세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거창한 이유를 댈 것도 없이 나는 다만 아무 준비도 없는 내게 사랑을 강요하는 강아지가 버거웠을 뿐이다. 온 식구의 열화와 같은 애정공세에도 불구하고 그 놈은 제 목줄을 쥐고 있는 게 나라는 걸 아는지 매번 나에게 1순위로 달려들었고 언제나 내 무릎을 탐했으나 나는 나머지 식구에게 여보란듯이 도도하게 그 놈의 구애를 시답잖아 했다.
개가 개다와야지, 내가 교육을 시켜야만 하는 그 모든 것들도 무슨 교도소 간수나 된 것처럼 기분 나쁜 것 천지였다.
참다참다 오줌을 쌌는데도 제자리에 안 눴다고 혼내주기.
사람 먹는 맛있는 먹거리 다 모른 척 하고 개밥만 안 먹는다고 굶기기.
먹는데 와서 껄떡거린다고 소리지르기.
소파나 침대 위에 올라오지 못하게 하기.
낯선 사람보고 시끄럽게 짖는다고 쥐어박기....
도무지 가장 개다운 짓을 하지 못하도록 버릇이라고 들이는 건 고아원에서 불쌍한 아이 입양해서 마음껏 학대하는 것만큼이나 고약한 기분이었다.
나 아니면 당장 이 추운 거리에 내몰려 금세라도 얼어죽을 것 같은 말 못하는 작은 짐승이 한없이 안쓰럽다가도 개 신발까지 비치되어 있는 애견센터의 당당한 고객으로서 순진한 인간의 고혈을 짜내고 있는 주인님으로 한 순간에 군림할까봐 하루종일 푸근한 마음이 되기 어려웠다.
아마 저도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주인 아줌마의 비위 맞추느라 살이 다 내렸을 것이다. 이런 내 마음의 파장 때문에 정이 들만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이런 마음 고생을 하느라고 난 딸아이의 감기 치료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면 저절로 회복이 될 만큼 건강한 아이였기에
처음엔 그러다 나으려니 했지만 나중엔 개 감기 치료차 개병원 다니는데 바빠서도 내버려두었다.
세 근도 안 되는 놈이 급하지 애 감기야 숱하게 겪어봤던 일이었던 것이다. 열흘 보름이 되어도 기침이 멎질 않자 슬슬 동네 병원을 나가보았지만 별무효험이었다.
한 달이 지나자 나는 개감기가 옮아서 아이에게 사람 약이 안 듣는 거라는 이상한 진단을 내렸다. 시간만 나면 개와 죽고 못사는 아이에게 심술을 떨고 강아지도 한번씩 째려보았다.
아이의 기침이 두 달로 접어들게 되었을 때 난 드디어 서울에서 믿거라 다니던 소아과 선생님에게 진료를 받기로 했다. 마침 갈 일도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