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며칠 전에 우체부아저씨가
친정에 카네이션을 보내라며 권한 적이 있었다.
카네이션 한송이와 호박엿으로 구성된 상품을
우체국에서 해마다 판매하는 모양이었다.
하나에 7천원이라며
"하나 하소. 돈도 얼마 안 하니더. 호박엿만 해도 얼만데..."
하며 권하는 것을
"아유, 아저씨! 그 돈이면 소고기를 한근 끊어다 드리죠."
하고 말았었다.
친정 부모님은 이때껏 어버이날이라도
가슴에 꽃을 달지 않으셨다.
쑥스러우신 모양이었다.
학교다닐 때도 아침에 달아드리면
금새 빼놓고 나가시곤 했다.
그래서 더욱 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어버이날 아침에 시어머님께 가서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둔 찬거리, 국거리 등을 챙겼다.
특별한 찬은 없어도 정성스레 준비하고
식사를 마친후에는 꽃도 달아드렸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엄마아빠 몫으로 만들어 온 꽃도
엄마달아드린다고 우기는 아이를 달래서
달아드리게 했다.
저녁에는 친정에 갔다.
전날 저녁, 남편에게
처가집은 어쩔 거냐고 물으니
저녁에 가보자 한다.
그래서 남편이 일을 마칠 시간에 맞춰
준비를 하고 있다가 바로 출발했다.
엄마가 이미 저녁준비를 다 마치고 기다리고 계셨기에
차리는 것만 거들어서 밥을 먹는다.
몇개 안되는 설겆이마저도 엄마는 그냥 두라며 성화다.
두분은 동네 회관에서 있었던 경로잔치에 가셔서
이미 저녁을 드셨다 한다.
그런데도 우리 땜에 다시 저녁밥을 지은 것이다.
우리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막내동생네와 남동생, 그리고 우리.
동생 둘은 오지 못했다.
엄마가 그저 가볍게 얘길한다.
동네 경로잔치에 가니 꽃을 안 단 사람은 두 분 뿐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친구분께서 그러셨다 한다.
"아, 이 사람아. 자식들이 안 달아주면
어디가서 하나 사다 달고 큰 딸이 보냈다 하면 될 것이지.
어디 자식도 없는 사람처럼 혼자 안 달고... 쯧쯧."
보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한 모양이다.
왜 꽃 안 달았냐고.
엄만 아버지 핑계를 대며 이야기 하시지만
내심 엄마의 마음도 들어있었겠지.
이젠 두 분도 늙으셨나 보다.
하긴 이제 몇년 있으면 환갑이니...
예전에는 달아드리는 것도 쑥스러워하시고
썩 달가와하지 않더니
이젠 안 달아준다고 서운해하신다.
"안 그래도 우체부 아저씨가 꽃이랑 호박엿 보내라는 거
내가 그 돈이면 소고기를 한근 사다드리겠다고 그러곤 안 샀는데..."
"그래. 그것도 맞다. 근데 너어 외숙모네도 그걸로 왔고
저 윗마을 누구네도 딸이 그거 보냈다더라."
"에고, 나도 그거라도 보낼 걸 그랬네.
내년에는 내가 꽃 달아줄께. 못 오면 그거라도 보낼께."
그냥 그렇게 넘어갔지만
마음은 몹시 씁쓸했다.
이래서 딸은 소용없다고 하는가 보다.
딸 많은 우리 엄마 아빠, 앞으로도 얼마나 더 서운해 하실까?
예전에는 부모님께 아들 좋아하지 말라고,
딸 가진 부모는 비행기 탄다고,
두고 보라고 큰 소리 쳤었다.
그런데 시집 와서 살아보니
이젠 그런 말 못하겠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시댁일이 우선이고
남편 자식이 우선이니
친정 부모님은 항상 뒷전이다.
결혼하면 이리 될 줄, 결혼이 이런 건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큰 소리 치며 딸이 더 잘한다,
아들 좋아하지 마라 박박 우겼었는데...
아침상 받으시고도 친정에는 어쩌냐고 한 마디 묻지 않으시는 시어머니,
저녁에 친정가기로 했다고 말씀드리니
대답도 않으시던 시어머니가 그래서 더 서운하다.
나는 왜 더 당당해지지 못 하는가.
왜 더 당당하게 내 몫을, 내 목소리를 높이지 못 하는가.
그것이 잘못이 아님을 알면서,
그것이 당연한 권리라 생각하면서도
관습의 벽을 넘는 것, 인습을 깨뜨리는 것이
결코 만만치가 않다.
나는 종종 말한다.
우리는 더 싸가지 없는 며느리가 되어야 한다고.
너무나 당연한 권리지만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당당히 주장하면
싸가지 없는 며느리가 되는 세상이니
우리는 싸가지 없는 며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싸가지 없는 며느리가 될 궁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