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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의 뇌진탕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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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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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늙어가는 방법 73


BY 녹차향기 2001-04-17

오래된 낡은 청소기,
연결부분이 깨어진 곳에 노란색 박스테이프를 붙이고, 흡입력도 떨어져 소리만 요란할 뿐 머리카락을 빨아들이기도 힘에 겨워하던 낡은 청소기를 한 구석에 밀어놓았어요.

뭐든 세월이 감에 따라 노쇠하기 마련인 것은 기계도 예외는 아닌가보죠?
문지방을 잘도 넘나든다는 그 동글이 청소기는 이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새로 구입한 것이었는데, 꼬박 햇수로 10년을 채우고서야 뒷자리로 물러났지요.
A/S받기도 수차례, 동네 근처에 있는 서비스센타로 가져가면,
점장님이 직접 차에서 운반해 주며 여러번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하다고, 인사를 듣는 청소기랍니다.

그 청소기를 올라타며 작은애가 컸고, 속상한 일이 있어 울고싶을 때 청소기 소리에 울음을 곱게곱게 집어넣으며 울었었지요.
하지만 워낙 새로운 제품들이 많이 나오니 어느 순간에서부터 슬슬 새로운 성능으로 중무장한, 세련된 디자인의 청소기들에 시선을 뺏기기 시작했어요.

텔레비젼 광고를 볼 때마다, 홈쇼핑 채널에서 무이자 몇 개월에 경품으로 무엇을 준다고 요란하게 떠들 때마다, 백화점 세일 때마다, 이웃집에 새 청소기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은 새로 하나 장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 찼지만 특별히 고장난 곳도 없고 단지 성능이 떨어지고 깨어져 테이프를 붙여 쓴다는 이유로 갈기가 참 그랬어요.

청소기가 요즘 것보다 더 무겁고, 흡입력이 약한 것이 결정적 원인이 되어서 결국 이웃집에 가서 새 청소기를 작동해 보고서야 改備를 결심했지요.
근처 할인점에 가서 아주 저렴한 가격에 무려 6개월 무이자로 할부를 끊으면서 무척 흡족한 마음이 되었고, 사오자마자 박스의 포장을 뜯고 청소기를 가동해 보았어요.

우와!!!!!!
어찌나 흡입력이 강한지, 거실바닥이 몽땅 뜯거나갈 것만 같더군요.
세련된 디자인, 속이 들여다 보이는 연결부위, 침대를 팍팍 두드리는 진동,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 정말 좋더군요.
구석이 박아놓은 오래된 청소기가 실망스런 얼굴을 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어요.
그리곤 베란다 한 구석에 밀어놓았지요.

며칠전 베란다 정리를 하다가 그 청소기에 다시 눈길이 갔고, 저걸 어떻게 처분할까...궁리하고 있는데, 아들 녀석이
"엄마, 저거 학교 가져가면 안되요?"
하는 거예요.
"잉? 저렇게 낡고 테이프로 칭칭 감은 걸 챙피하게 어딜 가져가?
그냥 버리면 되는 걸..."
"아녜요. 꼬옥 필요해요. 우리 다른 반에서 빌려다가 쓴단 말예요.
청소기 속에 있는 쓰레기봉투 있잖아요. 그거 꽉 차 있어서 우리가 손으로 먼지 끄집어내고 또 쓰는걸요..."

아이들 교실에 절실하게 청소기가 필요한 줄 몰랐지요.
그리고, 선생님께 어떻게 그런 헌 청소기를 보내겠어요?
한참을 망설였지만 아이는 무조건 괜찮다고 자기가 가져간다고 우기더군요.
어딘가 맞는 논리도 있는 것 같고, 아이들이 저희끼리 청소하며 쓰기엔 더없이 적절한것도 같고...
해서 눈 딱 감고 교실로 그 청소기를 보냈어요.

이틀 후, 저는 아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아주 고마운 편지를 한 통 받았답니다.
"준이 어머님,
어느덧 4월도 두째주입니다. 기대와는 다른 아이들의 모습에 다소 의욕도 꺾일법한 시기이지만, 날마다 새 마음을 먹기로 다짐해 봅니다. 빌려주신 청소기를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함께 마음으로 도와주시며 신경써주신 사랑의 배려를 경험하게 하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큰 위로가 되었답니다.
곁에서 마음을 나눠주신 준이 어머님께 감사하며 잘쓰고 돌려드리겠습니다........"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더군요.
얼마나 낡고 허름한 청소기인데, 성능도 약하고, 테이프로 빙빙 돌려감은 청소기인데, 그 사소한 것에 이렇게 선생님께서 고마워하시다니...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을만큼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 되었어요.
아이들 편히 쓰라고 그저 보냈을 뿐, 낡은 청소기니 함부로 쓰다 처분해도 괜찮겠다 생각했을 뿐이었건만 선생님께서 편지를 보내주시니 과분한 감사에 오히려 온 몸이 좌불안석이 되었지요.

휴....정말 죄송해서 어쩌나?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새 것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헌 것에 대한 편안함이 더 좋으셨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름대로 애써 해석하고,
저도 감사와 죄송한 마음의 편지를 보냈지요.
사소한 것에 그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선생님이시라면, 아마 아이들에 대한 정성도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구요.
또박또박 정성스런 편지에 감동받았어요.

밤이 꽤 늦었지요?
오늘 여러분들께는 어떤 감동스런 일들이 있었나요?
속상하고 어려웠던 일상의 일들도 또한 많았겠지요?
그게 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유려니 하고, 상했던 감정들은
주무시기 전에 다 풀어내세요.
햇살 좋은 창가에 힘들었던 감정들을 바짝 말려버리고 한방울 남김없이 증발시켜버리세요.
음악을 들으면 어때요?

그리고 낼 아침엔 아침식사를 마치는대로 뜨끈하게 녹차를 한 잔 마셔보세요. 아마 조금 다른 하루의 시작이 될거라고 생각해요.
(이뇨작용이 있어 화장실을 수시로 들락날락....ㅋㅋㅋㅋ)
몸이 조금 더 가뿐하고 개운해지실 거예요.
더 더워지기 전에, 피어나는 꽃들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
맑은 하늘과 나무에 삐죽이 돋아나는 새순도 찾아보세요.

그럼, 모두 평안한 밤 되시길 바라며,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