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언니!
내가 좋아하는 메밀묵을 쑤고, 내몸이 약하다고(?)
한약 한재를 달여 가지고 어제 오셨다.
큰언니와 막내인 나는 14살차이가 난다.
작년에 환갑을,올해는 진갑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는 내게는 엄마같다.
초등학교 1학년때 언니는 쪽두리쓰고
우리집 마당에서
전통혼례를 올리고는 대구에서 여지껏 살고 계신다.
7년동안 애기가 없어 엄마의 가슴을 애태우게 했었고,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부터 토요일이 되면
엄마는 집에서 약이며 곰거리를 다려 대구언니집으로
심부름을 보냈었다.
짐을 들고 가는건 싫은데 언니에게 가면 옷도 사주고
맛있는것도 해주기때문에 그당시 3시간반이나 걸리는
완행 버스를 지루한줄 모르고 타고 갔었다.
따뜻한 경남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대구의 혹한,더위에도
방학때만 되면 나는 언니집에서 반을 다 보내고 왔었다.
내가 결혼할때 언니는 '여자는 남자 한사람보다
그 집안을 보고 시집가야된다'며 극구 말렸고,
당시 군인이었고, 둘째아들이라 시가집에 잘오지 않을거니
걱정말라며 언니의 염려속에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2년만에 5개월된 큰아이를 업고
도저히 못살겠다고
차마 엄마가 계시는 친정은 못가고
대구에 있는 언니집으로 갔었다.
언니는 기가 차는지 암말도 안했고, 형부는
'우리 처제 사랑싸움했나' 하시며 대수롭찮게 여기셨다,
사흘이 지나도 갈생각을 안하는 나를 보고는 할수없이
엄마에게 연락을 했고,
죽어도 안가겠다고 버티는 막내딸을 본
엄마는 형부 보기가 미안한지 다음날 아침 일찍 큰애를
대신업고는 언니집을 나서면서
'여자가 시집을 가면 그집 문턱안에서 죽어야만 나올수 있다'며
앞장서셨다.
전방에서 중대장하던 남편따라 살던
'인제'가면'언제오나'원통'해서 못살겠네. 라는 우스개 말이 있던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
버스를 네번이나 갈아타고
7시간이나 걸리는 강원도 우리집으로 나를 끌다시피
데리고 가셨다. 이제 엄마는 돌아가시고 안계시고,그후로는
두번다시 내손으로 보따리싸는 일은 없었지만
엄마대신 큰언니에게 하소연 하면서 나의 힘든시절을 넘겼었다.
언니는 구석구석 집안을 살펴보고
간장,된장 고추장도 다시 다둑거려 준다.
오늘, 백화점에 가서 언니에게 연한 보르도색깔의
봄옷 한벌을 사드렸다.
차타고 오면서 테잎노래를 따라 부르는 언니를 보니 꼭 엄마같다.
내일은 같이 부모님산소에 다녀올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