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당신은 술에 취해서 전화를 했지요.
차창으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이 넘 좋아 보여서 일부러 남산 쪽
으로 돌아 오기로 생각했습니다.
맑은 날이지만 조금 뽀얗게 보이는 용산, 한남동 너머, 한강까지
넘 멋진 것 같아서 길다란 계단이 있는 곳에서 차를 멈추고 간지
르듯이 따스한 햇살을 목 언저리에 느끼며, 계단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중간쯤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미리 커피캔을 준비하길 잘했군요.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는 듯한
서울의 전경을 내려다 봅니다. 참 믿을 수 없이 조용해 보입니다.
장난감 같이 보이는 저 아래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자기
들 만의 일상을 꾸려 나가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아래 손바닥 만한 광장 비슷한 곳에 비둘기 들이 날아오릅니다
언제 보아도 새들은 참 멋지게 나릅니다. 날개를 쭉 펴고 미끄러
지듯이 날아 오를 땐 그 자체로 어느 사진잡지에서 본 한 장면
같습니다.
한낮에 남산에서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자니, 뭔가 스스로
부족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약간의 근심과 그 근심이 예전 고등
학교 때 조회를 빼먹고 학교 뒷산에서 바로 요런 햇살을 받으며
Gerry Rafferty 의 Baker Street 를 듣던 때의 그 느낌과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어지
러운 세상에 꿈을 가지고, 또 그것을 일구려 노력하는 심각한 얼
굴의 젊은이들이 긴 계단을 오르내립니다. 누구 한 사람, 부서지
는 햇살보다 더 멋지게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사람이 있을까 싶
어서 두리번 거려 봅니다.
담배갑을 뒤집어 손바닥에 몇 번 툭툭 내려 칩니다. 한개비를 꺼
내어 불을 붙이다가 혼자서 피식 웃고 맙니다. 지난밤 대학원 동
창넘이 술에 조금 취해서 이러더군요.
넌 학교 다닐 때부터 조금 남다른 넘이었어. 너 좀 잘해라. 너 같
은 넘이 좀 잘되야 되지 않겠니? 그리구 너! 하다 하다가 진짜
잘 안되면 그때 내게 와라. 내가 점심 한번 사마...
본의 아니게 벼락을 맞아서 먼저 가신 분들에겐 정말 죄송하지만,
이 넘 벼락이라도 함 맞아야 제정신 차릴 것 같았는데, 워낙 진
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유야무야 되었습니다. 나중에 다른 친구들
이 다들 뒤집어 지더군요.
기원전에 살았다고 문헌에 나와 있는 디오게네스가 만약 이런
햇살아래 앉아 있었다고 하면, 그래요 성질 날만 하군요. 그게 알
렉산더 대왕이든 누구든 햇살을 가려서 오싹하는 한기를 느끼게
했다면요...
년 전에 암스테르담의 뉴께르끄 (Niew Kerk - 신교회) 광장에 이렇
게 편안 하게 주저 앉아 있었지요. 국산품이니까 아는 사람 만날
일도 없고, 면바지에 편한 구두 차림으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
들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아니 그보다 좀더 먼 기분으로
무심히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북적이는 사람 많은 그곳에서 나는 이방인이었고, 나는
가슴속의 당신을 조심스레 끄집어 내어 마음껏 그리워 했습니다.
북유럽의 날씨치곤 우연처럼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가슴속에 벅
찬 기쁨을 느꼈지요. 이제 돌아가면 뛰어 오르며 나를 반겨줄 한
사람 때문에요.
당신은 이제 내가 차에서 내려 이 햇살 속을 걸어서 다가가면 10
분도 걸리지 않을 곳에 있슴을 압니다. 하지만 지구의 반대편에
나의 심장이 있을 때보다도 우리는 더욱 멀리 있군요. 이렇게 따
스한 햇살 속에 나는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내 어깨에
머리를 가볍게 기대었을 때, 당신의 머리결은 따스했고 늘 참 좋
은 향이 났었지요.
지난밤 당신은 술에 취해서 전화를 했지요. 내가 그리운가요? 내
가 미운가요? 잊고 싶지만 잘 안되나요? 아님 그냥 장난으로 돌
을 던져 보고 싶었나요?
속을 알 수 없는 당신이지만, 저는 그냥 지금 이 따스한 햇살을
치즈케익 처럼 예쁘게 잘라 추위를 많이 타는 당신에게 보내드리
고 싶군요.
햇살이 따스했던 날 도곡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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