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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스픈 그리움 두스픈


BY 불루마운틴 2000-08-26

며칠째 비가 내린다
비와 커피.
난 이두가지를 병적으로 좋아한다
첫아이, 두째 아이를 가져서도 열달 내내 하루종일 커피로
살았을 정도로 말이다
새벽
빗소리에 잠이 깨 커피 한잔 들고 창밖을 내다 보고 있으면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하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은 혀를 찬다
"쯧쯧... 사십이 넘은 나이에 왠 청승?
나이는 거꾸로 먹나? "
하지만 비오는 날이면 어떤 핀찬도 걱정도 다 잊을수 있다
커피 한스픈에 소중한 추억 하나를 끄집어 내어 그리움
두스픈에 섞어 저 내리는 비를 바라 볼수 있으므로...
이제 생각하면 웃을 수 있지만...
그땐, 그 나이엔 참으로 힘든 나이였었나 싶다
낡은 일기장속의 그 시절이 그리워 진다
대학 시험에서 떨어지고 세상에서 철저히 버림 받은 더러운
기분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는데...
며칠을 방안 구석에 얼굴을 파 뭍고 지냈다
쾡한 눈으로 언니를 불렀다
"언니 나 여길 떠나고 싶어. "
걱정스런 그런 얼굴로 언니가 웃었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 이 더러운 기분 버릴수 있으면...
새로운 길을 찾아볼께. "
"밥은 꼭 꼭 챙겨 먹어.
전화는 가끔 할꺼지? ?
언니는 책상 서랍에서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었고 손가락
에서 금반지 두개를 뽑아 내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 아주 급할때 용이하게 써.
그리고 빨리 되도록 빨리 제 자리에 돌아 왔으면 좋겠어."
나와 둘이 서울서 자취하는 두째 언니는 언제나 처럼 나를
이해하고 있었다
고속터미날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쯤에 내가 숨을곳이 있는걸까?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순간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그래... 전주야. 전라도 전주로 가는 거야...
한스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전주행 표를 사들고 잠시 그를 생각했다
전화 할까...
어젯밤도 한스의 전화를 받았다
"바보야. 시험이 인생의 전부는 아냐.
시험은 다시 보면 되고... 안그래?
나와라. 화실에 네가 없으니까 영--- 아냐.
보고 싶어 우리 같이 그림 그려 본지 꽤 ?瑩?
꼬맹아! 듣고 있니? "
당당하게 합격해서 그가 다니는 학교에 나란히 다니고 싶었다
그의 칭찬도 그렇지만 난 내 그림에 자신이 있었고 오만했었다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이 있었는데 한심하고 비참한 꼴이 되
버린 나는 이렇게 도망치고 있는거다
그래... 그냥 가는거야.
언제나 자랑스럽게 얘기하던 그의 고향으로.
전주는 양반의 도시답게 조용하고 깨끗했다
하루 종일 여기 저기를 기웃거린 끝에 이름처럼 예쁜 화실을
찾을수 있었다
<허수 아비 >
여느 화실과는 다르게 깨끗히 정리되 있는 화실안을 들여다
보았다
선생님은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눈빛이 아기들의 그런 맑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냥 낮에만 데리고 있어 달라고 때를 썼다
밤에는 독서실에서 잘 작정이었다
작업실이라 학생을 두지 않는다고 해서 한시간을 옆에서 징징
조르고 또 졸랐다
고집으로 밀고 나가는 나에게 웃음으로 승낙한 선생님은 전주대
시간강사 였고 남은 시간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새벽 2시면 작업실을 비워 주었고 집에서
김치도 날라다 주었다
새벽 2시까지 같이 앉아 커피도 마시고 유화도 그리고 수채화
도 그렸다
어린 나이에 겁없는 철부지의 가출을 그사람은 아무 말없이
받아 주고 있었던 거다
왜 이곳에 왔는지 내 이름 조차도 묻질 않았다
내 얼굴에 비췬 절망의 무게가 그에게도 조금은 느껴졌던
것일까...
그렇게 시간은 가고 점점 그의 그림속에 난 흠뻑 빠져 있었다
그의 수채화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그 내면속으로 빠져들것
같은 그런 매력이 있었다
어둡고 우울한 저음이 있으면서 건들면 쨍하고 소리가 날것
같은 투명함.
그런 느낌이었다
그 사람도 내게 꼬맹이라 불렀다
"커피 줄까? 꼬맹아! "
"네. 조오쵸! "
테레핀 냄새와 커피 냄새...
"너 그러다가 위장에 탈난다. 커피 때문에. "
"피--- 커피 값 아까워서 그러죠? "
"자식--- 눈치 챘냐? "
"나중에 제가 커서 돈 많이 벌면 트럭으로 나를께요
커피요."
"돈번다고 하는거 보니 너도 그림쟁이는 되기 틀렸군... "
우린 그렇게 웃었다
새벽 아무도 없는 화실에서 깨면 울컥 울컥 치미는 그리움이
있어 나를 우울케 했다
한스... 보고 싶다...
손바닥 만한 창가로 보이는 밖은 한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이곳에 내려와 밖는 거의 나가질 않았다
포장된 이상자갑 속에 꼭꼭 숨고 싶었던 것 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거의 한달이 되가고 있었다
저녁 비가 내렸다
추적 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선생님은 아주 반갑게 전활 받았다
"꼬맹아! 오랜만에 우리 목 축이게 생겼어.
전에 내가 그림 봐주던 후배가 있었는데 꽤 그림을 잘 그렸지
서울로 대학에 간후로 한번도 만난적이 없었거든?
무슨 바람이 불어 지금 내려 왔다는 구나.
너 요 앞 슈퍼에 가서 안주거리 좀 사와라.
술은 그놈이 사온대. 빨리 서둘러 이근처라던데? "
"후배요? 잘생겼나요? "
"자식--- 나보다는 못하지? 아마? "
"피---- 알았어요 "
오랫만에 나가본 밖은 상큼했다
비를 맞으며 이것 저것을 골라들고 화실문을 열었다
커튼으로 드리워진 선생의 작업실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의 후배가 온것이다
"꼬맹아! 얼른 가지고 이리와 "
평소와 다르게 들뜬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커튼을 젖혔다
"안녕하세요. 저는... "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있는 후배를 본 순간 가슴 저 밑바닥에
꼭꼭 숨어 있던 응어리가 나도 모르게 툭 튀어 오름을 느꼈다
"어! "
한스 그였다
새벽녁 군용 침대에서 눈을 뜨면 문득 문득 떠오르던 얼굴
"뭐야? 서로 아는 사이야? "
한스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선배님이 말하던 그 골치덩어리가 바로 너냐? "
"꼬맹아! 너 이녀석 아니? "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꼬맹이 그림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더니...
너 이녀석 화실에 있었던 거지? "
대답대신 안주감을 테이블에 펼쳐 놓았다
"너, 무슨 잘못을 했길래 꼬맹이가 여기까지 오게 한거야? "
큭큭 거리며 한스가 웃었다
"너 여기서도 꼬맹이냐? "
"선생님! 저도 한잔 주세요"
"조 오치! "
선생님은 한잔 그득 따라 주었다
참으로 더러운 기분이었다
"그래도 네가 서울을 떴다길래 걱정 많이 했는데 선배님 곁에
와 있는걸 보니 다행이다
여기 있는줄 알았으면 그렇게 마음이 아프지 않았을 텐데..."
"그러니까 꼬맹아, 너 대학 시험에 떨어져서 가출한 거니?
대단한 아이다, 너.
너 이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모르지?
너 내가 몹쓸짓이라도 했으면 어쩌니? "
"그만이죠 뭐 더러운 세상"
"어쭈? 고작 시험에 떨어진게 인생 낙오자 같은 말을 하네."
한스가 그의 긴팔을 내 어깨에 뻗어 왔다
"꼬맹아 내일 나랑 가자, 서울로..."
"싫어요 "
"가 임마! "
"상관 하지마요 제발... "
선생님이 내 이마를 주먹으로 때렸다
"나도 너 이젠 싫다 네가 그런 시시한 이유로 여기 왔다면
처음부터 널 받아 들이지도 않았어, 임마!
저 녀석이 널 많이 아끼나 본데 따라가
나도 이제 내 작업실 되 찾으련다
여자 냄새도 안 나는것이 그래도 있다고 신경 쓰여.
가서 저놈이랑 싸우던지 놀던지 니네 맘데로 해봐 "
늦도록 마시고 휘청거리며 밤을 보냈다
군용침대에 벌렁 누워 잠이 든 나는 새벽녁 잠이 깼다
선생님의 작업실쪽 바닥에 널판지를 깔고 선생님과 한스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한참을 그 모습을 들여다 보다 주섬 주섬 옷을 껴 입었다
가지고 온 가방에 칫솔과 옷가지를 챙겼다
그리고 노트 한장을 뜯어 편지를 썼다
< 선생님.
주무시는 모습 바라보다 이렇게 떠납니다
올때도 제멋데로 왔고 갈때도 버릇없이 갑니다
이곳에 올때의 절망을 조금은 벗어 놓고 갑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커피 생각 날때 마다 선생님을 그리워 할지도
모르겠네요
이세상 어디에도 저의 부끄러움을 숨길곳은 없다는 커다란 배움
을 갖고 갑니다
이담에 선생님 만큼 크면 다시 뵙고 싶습니다
좀더 당당하고 의젓한 여자로 말입니다
안녕히-->
버스에 몸을 싣고 서야 창밖에 내리는 비에 끄윽 끄윽
웃고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