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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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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에서


BY 베티 2000-11-01



<산책로에서>

오전 11시경, 옷 위에 겉옷을 하나 걸치고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날씨가 흐려서 조금은 쌀쌀한 날씨지만 20여분을

걸으니 제법 몸에서 열이 나와 겉옷이 부담스러웠다.

겉옷을 벗어서 허리에 질끈 감았다.

그쯤 되면, 쭈욱 늘어선 화원에서 한참 피어난 국화들이

마구 코끝을 자극한다.

깊이 숨을 들이쉬니 쌉싸한 향기가 가슴 깊숙이

들어온다.

향기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 새 화원은 끝이 났고

신호등을 만나게 된다.

신호등을 건너 조금 더 걸어가면 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 중의 하나로서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계단을 중간쯤 올라가다 보면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들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고 있다.

요즘은 보기가 쉽지 않아서인지 더 반갑다.

꽃을 보고 있노라니 윤 동주님의 시 한편이 떠올랐다.

<코스모스>

淸礎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少女가 못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오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이십 대에 단 한번만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이다.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시를 기억하게 해 준 코스모스를

뒤로 하고 산으로 올라가면 유명한 산 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울긋불긋한 단풍들이 보인다.

그러면 어느 새 내 몸도 산의 일부가 되어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다.

산 허리를 빙 돌아서 길로 닦아놓아 휴일이면 꽤 많은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여길 온다.

중간중간에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운동기구도 설치되어

있고 배드민턴장을 비롯해 아이들의 놀이터도 있기

때문에 우리도 가끔 찾곤 한다.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뭔가 툭하고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돌아 보니 작은 솔방울이었다.

그것이 떨어지며 난 소리였던 것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바닥에 있는 것 중에 예쁜

것으로 하나를 골라 집어들었다.

둘째 아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2,3년 전만 해도, 집 앞의 공원에서 같이 놀다가

'으앙'하고 울음을 터트려서 가보면 솔방울이 무섭다고

우는 것이었다.

가져다가 보여주면 뭐라할지 사뭇 궁금해진다.


숲속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니 언뜻 숲이야

말로 여성의 자궁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속에 사는 생물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고 영양분을

제공해 주며 보호도 해주니 말이다.

숲의 따뜻한 품 안에서는 생물들의 번식과 성장이

끊이없이 이어지고 있으리.

아낌없이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는 것에선

어머니들의 모성애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 후에는 약수터가 보인다.

약수 한 모금으로 목을 축여주고 잠시 의자에 쉬었다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 뜀박질도 해 보았다.

경사가 고루지 않고 높았졌다 낮아졌다 하지만 입을

악물고 힘껏 뛰어본다.

숨이 차면 다시 걷고...


옆의 숲을 보니 노오란 소나무 잎이 많이도 쌓여

있다.

그 나뭇잎들은 나를 어린시절로 데려간다.

초등학교 시절, 왠만큼 큰 아이들이면 방과 후에

새끼로 만든 광주리와 갈쿠리를 하나씩 들고 산으로

올라간다.

땔감으로 쓰기 위해 바로 그 노오란 소나무의 잎을

긁어오기 위해서다.

한참을 박박 긁어 모으다 보면 누가 소리치고 있다.

그 산의 주인인 것이다.

붙잡힐까봐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벗겨지는 신발을

간신히 집어서 도망치던 기억이 새롭다.

무성하게 깔려있는 나뭇잎들만 보면 아깝다는 마음이

든다.

어린 시절에는 너도나도 땔감으로 해 가기 때문

에 그리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르락 내리락 걷다보니 아주 작은 아기 소나무와

아기 단풍나무가 눈에 띠는데 작은 것들은 모두

그렇게 이쁜 것일까?

나도 모르게 캐어다가 화분에 심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내 머리를 젓는다.

아기가 자궁을 떠나면 자랄 수 없듯이 그 아기 나무들도

숲을 떠나면 맘껏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주 보이는 쪽에서 할아버지 두 분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시는 모습이 보인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인생의 황혼길에 저렇에 같이 걸을 수 있는 길동무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이제 산길도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경사가 제일 많이 진 곳이 나타난다.

힘껏 발바닥에 힘을 주면서 내려간다.

넘어질까봐 조심조심 하면서...

이제 산책로는 끝이 났고 코스모스가 있는 계단으로

내려온다.


산책로를 한 바퀴 돌고나면 나는 인생의 여정을

한 바퀴 돌고 온 느낌이 든다.

과거에서 미래까지 모든 일들이 산길에도 있고

숲에도 있고 마주치는 사람들에 까지도...

그 속에 나의 인생이 사이사이 배어 있는 느낌이다.

산책로를 뒤로 하고 내 몸은 올라 올 때처럼 산에서

분리되어 활기찬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