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웅(우리 집 5살 짜리 큰 아이)이가 다니는 학원에서 연락이 왔다.
내일이 오리엔테이션이니깐 꼭 참석해 달란다. 며칠 전에 안내엽서를 받고도 별 다른 대답을 해 주지 않았더니 오늘은 담임 선생님이 직접 전화를 하셨다.
'작년에 다녔던 학원인데 새삼스럽게 오리엔테이션은 뭔가? 또 돈 내라는 얘기겠지?' 싶어 흘러 넘기려다.. 아차, 이게 아니지 싶었다.
'반도 바뀔테고, 담임도 바뀔테고, 찬웅이가 착하긴 하지만 내가 모르는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 내심 염려와 호기심을 안고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사락사락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학원으로 자박자박 걸어가자니 내가 무슨 대단한 학부형이라도 된 듯 마음이 설레었다.
자식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모든 엄마가 마찬가진 듯 눈바람이 제법 거센 궂은 날씨에도 많은 엄마들이 모여 있었다.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엄마들을 소꿉의자처럼 작은 의자에 앉혀 놓고 원장은 학원자랑을 늘어지게 했다. 그리곤 돈 얘기도 잊지 않았다. '미술학원이 일제히 회비를 조금 올리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좀 더 창의적이고 미술을 접할 기회를 많이 주기 위해 좋은 교재를 구입했다'는 등...'그럼 그렇지' 싶어 씁쓸한 마음이 커 가고 있는데 원장은 한 마디 덧 붙였다.
"올해는 학급이름을 바꿨어요. 작년엔 색깔로 반을 정했는데 (초록반, 노랑반, 분홍반 등) 올해는 세계화에 발 맞추어 외국 화가들의 이름으로 바꿨답니다. 피카소반, 마네반, 모네반 등으로요"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였을까? 난 괜히 트집을 잡고 말았다.
"한국화가는 어때요? 세계적인 한국 화가가 얼마나 많은데요. 김홍도, 이중섭, 김기창화백... 또, 누가 있더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틀린말은 아닌데 아무래도 학급이름으로 정하긴 좀 낯선가보다.
하여간 5살 찬웅이 반은 "마네반" 4살반은 "파카소반" 6살반은...라고 한다.
다음 날,
찬웅이와 같은 학원에 다니는 나경이(윗층에 사는 4살짜리 여자아이)가 나란히 학원을 다녀왔다. 집으로 올라가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난 아이들에게 장난스레 물어봤다.
"나경이는 무슨 반이에요?"
"피카츄 반이에요"
내가 웃음 짓자 한 살 더 먹은 찬웅이가 오빠랍시고 거든다.
"피카츄가 아니고 피카소야...엄마, 나경이는 피카소반이에요"
"응, 그래? 그럼, 우리 찬웅이는 무슨 반이지?"
찬웅이는 기다렸다는 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난 네모반이에요"
^^;
찬웅이에게 마네는 세모, 네모, 동그라미와 다름없는 하나의 도형에 불과했나보다.
그 날,
'김홍도, 이중섭...'으로 하자고 박박 우길 걸 그랬나? 우기는데는 이길 장사없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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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이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어나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