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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견디나


BY 얀~ 2002-03-18

지친 몸으로 하루를 견딘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토요일 딸아이와 옆집 아이 둘이서
사지 말라고 한 병아리 네 마리를 덜컥 사 놓고는
밤새 울어대는 병아리를 보자니 맘이 아팠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느낌이 없으니,
질끈 눈감고 있을 때가 많다.
무던히 두꺼운 감정의 막을 형성하고
어떠한 공격에도 반응을 하지 않기로 말이다.
토요일 네 마리의 병아리 중 한 마리는
다리를 v자로 벌리고 죽었고,
세 마리는 서로 날개를 밀착한 채 서서 온기에 의지하며 견디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 병아리의 울음이 거세졌다.
죽음으로 가기 전 고통스런 울부짖음으로 어지럽히더니
아이들이 놀러 나가고,
모임에 나가려고 하니 한 마리만이 움직임이 있고
나머지는 전부 갔다.
남편에게 묻자고 했더니,
움직임이 있는 한 마리를 생매장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박스까지 현관 밖으로 밀려났고, 전부 죽었다.

월요일 아침,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작은어머님의 전화는 내게 날카로움을 선사했다.
물론 꿈이 하 뒤숭숭하여
대전의 형님내외가 걱정되어 전화하신 줄은 알지만
어머님의 건강도 물었지만,
증오를 밀고 오는 바람을 난 거부하고 싶었다.
평온하게 견딘 나날이 작은어머님의 전화로 깨지고 있었다.
차라리 생각조차 말자고,
차라리 눈앞에 안보이니 편타고 누누이 말하고 있지만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는 일인가.
작은어머님도 많이 약해지셨고,
물론 어머님도 많이 약해졌다.
시 아주버님 위에 딱 두 분의 가까운 어른이 있다.
어머님과 작은어머님이시다.
큰자식에 대한 애틋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에게 있어 대전 형님부부는 아픔이고, 또한 형벌이다.
극단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는 두 분의 모습이 있다.
시 아주버님의 그냥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모습과
형님의 개처럼 날뛰는 모습이다.
두 분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 세상을 많이도 배웠다.

종교의 역할은 사회나 학교에서 통제하지 못하는 부분을
통제하는 데 있다.
내가 종교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맘속에서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것은 나쁜 일이며
아직도 순간 이를 들어내고
파괴적인 감정들이 술렁거려 눈감고 있음을
툭툭 건드릴 때는 맘을 다스리기 힘들다.

시어머니 칠순을 앞두고 형님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기 때문에 괴롭다.
밤늦게 들어와
동서와 가게문을 닫고 들어가 기다리다
밥을 못 먹었다는 말에
밥 차려준 밥상을 상 채 엎고,
시어머님에게 삿대질로 처신 똑바로 하라고,
남편 멱살 잡고 뺨을 때릴 때
남편의 무저항 맞고 있는 모습이
그 모습들이 너무나 생생하여
아예 죽음처럼 밀어 넣고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자신의 탓은 하나도 없이
하나님 믿고, 남편 하늘처럼 떠받치고 산 죄밖에 없다하여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물론 남편이 무능하여 사고를 냈고,
그 고통이 부부도 힘들겠지만,
재산 다 큰자식 주고 빈 몸으로 작은 집에 거쳐하는 어머님의 심정은 왜 모르고,
형만 믿고 마누라의 말은 안중에도 없던 시동생의 착함은 어찌 모르고...

어머님과 제사를 모시게 되었고,
아버님이 사 놓은 산이, 아주버님의 빚 탕감의 재물이 되어 경매 들어와
유일하게 내 앞으로 들어 놓은 노후대책 보험이 날아갔습니다.
그러고도 어른들은 미꾸라지처럼 빠지는 형제들은 뭐라 안하고,
끝끝내 우리 부부만 물고늘어집니다.
그게 죄지요, 내 탓으로 남편 탓으로 돌리기엔 억울하지만
그리하여 죽음처럼 잊고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병아리의 울음이 통곡으로 들렸고,
감각을 후비는 울음이 몇 일은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