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임시공휴일 어느 날이 낫다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473

과거는 흘러갔다


BY 바늘 2000-10-28


나의 살던 고향은 복숭아꽃 살구꽃은 없어도 빛고운 아기 진달래가 흔하지 안했어도 늘 정겨움으로 자리하고 있다.

늘 누구나에게 고향이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있기 마련이니까...

난 서울과는 가까우면서도 아주 세련된 도시가 아닌 인천 짠물내음 나는 곳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많은 발전도 하고 고속도로가 연결되있으니 서울의 건너방 같은 도시지만서도.

우리 친정은 모두 이북 황해도분들로 인천으로 피난와 정착을 하셨다.그러니까 실향민 바로 그 표현이 맞을것이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맏이인 덕으로 늘 집안에 북적거리는 식구들로 가진것 별로 없어도 너무나 화목하게 살았다.
할머니와삼촌두분 과 고모 한분 이렇게 함께 살았으니 대가족인 셈이었다.

할머니는 늘 무엇이든 뚝딱이며 잘 만드셔서 닭장도 만드시고 앞마당에 시멘트 와 모래를 적당한 비율로 배합하여서, 건축을 전공한것도 아니건만 작은 수돗가도 맹글고 장독대도 땅과의 높이를 고려하여 적당한 높낮이로 건축(?)하여 그 사각의 무대속에 반질반질 잘 ?M여진 장독들이 올망 졸망 거기서 숨쉬게 만드셨었지.

삼촌들은 늘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셨던 기억이 새롭다.
큰 삼촌은 늘 영어 원서를 들고 그안에서 사셨는데 그 덕으로 우리나라 에서 젤루 알아주는 호텔에서 최고 경영자로 성공하셨다. 5개국어를 다하시고 초등학교도 안나오신 울 할머니의 어떤 가르침이 그리 산교육을 잘하신것인지, 이제와 내가 엄마되어 아이를 키워보니 참 고것이 알고싶다.

아 이제,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작은 삼촌이야기를 해야것다.

벌써 둘째 삼촌이야기를 하려니 너무나 신이난다.
50을 훨 넘기신 작은삼촌은 지금도 나와 아주 친하게 지내신다.

이멜도 가끔 주고 받고,시끄러운 라이브 까페에도 모시고 간다. 그러면 너무나 좋아하신다. 작은 삼촌은 인천에서 지금도 명문인 제물포 고등학교를 아주 우수한 실력으로 들어가신 수재였다.
아~ 그러나 워낙 잘생긴 인물 덕으로 수많은 녀들의 무차별 구애로 어느 순간 무너지시더니,끝내 생각한 이상대로 나아가지 못하시고 조금은 돌아서 씩씩하게 세상을 헤쳐 나 가셨지.

늘 우리집 앞은 인천의 각학교 여학생들이 연애 편지 들고와 조카인 나에게 왕사탕 사주면서 우체부 역활을 부여하곤 했다.
인기있는 삼촌둔덕에 내 다친 이 치아는 어디서 보상 받으랴~~

마지막으로 우리 천사표 고모는 늘 어려운 가게를 도우려 직장에 다니셨다. 그러다 공무원인 고모부를 만나서 결혼하셨는데 이틀이 멀다고 매일 매를 맞고 오셔서 어린 내마음에도 결혼하지 말어야지 하는 맘이 들게도 하셨다.
고모부는 아주 심한 의처증이 있어서 고모에게 매질을 하신거였다.
그런 고모부는 늘 술에 쩔어 사시다가 그만 어느날 머리를 다치셔서 약간의 기억 상실증과 함께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다행인것은 꽤 많은 퇴직금을 남기고 가셔서 또 야무지게 살림 잘하는 울 고모는 지금 잘 살고 계신다. 그래도 불행중 다행이라 생각하고 어쩌면 고모부의 그 힘겨운 괴롭힘에서 해방을 맞았다고 해도 말이 될것이다.

아! 글고 우리 아버지
아버지 세글자만 불러도 목이 메어 온다.
거의 맨손 들고 이북서 나오셔서 동생들 공부시키고 대가족 생계를 다 어깨에 짊어 지시고 을메나 힘겨우 셨을꼬.

법은 우리 아버지 같은 분에겐 정말 없어도 될 정도 였건만 아버지는 삼년전 구정을 앞두고 친정에 다니러 간 나에게,왜이리 속이 더부룩 하냐시더니,구정 지나 병원에간 결과 식도암 진단을 받으시고 6개월 그렇게 사시다 조용히 가셨다.
난 아버지가 너무나 사랑하는 막내 딸이었고 그런 아버지가 나에겐 정말 기대고픈 커다란 느티나무였건만 아버진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무지 더운 8월 그리 홀로 가셨다.
병원에 계시는 동안 그리 통증이 있어도 간호원이나 의사들 피곤하게 한다고 늘 인내로 참으시고 의사 선생님 말씀 왈 저리 인내심 강한분도 드믈다고 하시며 오히려 그런 아버지에게 각별한 정성도 주셨었다.

난 살아가면서 물질이 풍요가 바로 행복은 아니란걸 느끼곤한다.
그옛날 내가 살던 울 친정집 그리 풍요롭지 않았어도 너무나 행복,그것이 살아 숨쉬던 둥지 였기에,조금은 사람이 부족함에서 서로 정이 두터워지고 ,조금은 아쉬움이 있어야 남의 힘겨움에 마음 아픔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움튼다 생각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결코 복숭아꽃 살구꽃은 안폈어도 늘 화목한 웃음꽃이 피던 아름다운 마음의 고향이었다.

아~이밤 노래를 그렇게 못하시던 친정아버지가 늘 한잔 하시고 즐겨 흥얼 거리시던 흑산도 아가씨란 노래가 귓가에 아련하다.

아버지 너무나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