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봄날은 간다...아니,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다 간다...
너무 가슴이 아파서 정말 너무 가슴이 아파서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을려고 했는데, 주책맞은 눈물들이 어찌나 방울방울 떨어지든지...얼른 누워버린 이불 속에서도 눈물은 쉼없이 쏟아졌습니다. 영화 속에서 불던 대나무 숲의 바람소리가 우리 집 천정 위에 붙어서는 내가 잠 들때까지 사라지지 않더군요.......
이건 설날 전전날 봤습니다.
개봉한지 꽤 된, 올 봄에 상영했던 영화던가요?
사랑을 소리로 담았다는 영화...로 소문자자했던...
텔레비전에서 주요 장면은 다 보여주었고 내용도 뻔히 다 알고 있었지만, 제 전공이 또 '사랑' 아니겠습니까. 사랑영화...당연히 봐야죠.
타이타닉을 보고도 졸 정도인 감수성 빵점 신랑이 마침 시동생이랑 당구 한 게임 하고 온다길래 이때다 싶어 얼른 빌려다 봤습니다.
유지태, 이영애..
소리를 녹음하는 청년 상우...소리를 전하는 이혼녀 은수가 나옵니다.
자연의 살아있는 소리를 함께 채취하러 간 두 남녀는 인위적으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도 없는 자연의 소리에 물들어...사랑까지 물들어 버립니다... 누가 인위적으로 사랑의 물을 들인 것도 아닌데 말이죠.
사랑이 다가옴에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상우..
그리고 상우 만큼이나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은수...
상우는 사랑에 기뻐하며 자꾸만 다가가려고 하고 은수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줍니다.
그러는 동안 자연의 소리는 계속 녹음되고 둘은 별 말 없이 자꾸만 사랑을 쌓아갑니다. 녹음한 비소리를 틀어놓고 각자 회사 상사에게 비가 와서 하루 더 있다가야겠다고 연락을 한 후 히히덕 거리는 두 사람,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느닷없이 보고싶다면서 한 밤 중에 택시를 타고 강릉으로 향하는 상우, 어스름한 새벽녘에 집 앞 도로에서 목 빠지게 상우를 기다리는 은수..아파트베란다에서 상우를 배웅하는 행복한 은수....모두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으로 사랑을 확인합니다.
하지만,...아빠가 여자친구 데려오라고 했다는 상우의 말에, 은수는 싸늘히 식어버립니다. 앞뒤이유도 없이 다짜고짜 "헤어지자..."고 하는 은수...영문도 모른 채 사랑을 놓아야만 하는 상우...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리고, 은수의 새로운 사랑.
상우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미칠지경이 되어버리고,
아무 울림 없는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가 성질을 내고,..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는 자기의 직업마저 놓아버릴려고 하고..
마당이 보이는 자기 방 창문에서 아빠가 즐겨부르던 "미워도 다시 한번"을 악을 써가며 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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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명 다바쳐서 죽도록 사랑했고
순정을 다바쳐서 믿고 또 믿었건만
영원히 그사람을 사랑해선 안될 사람
말없이 가는 길에 미워도 다시 한번
아 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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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 두 사람의 사랑과 헤어짐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섬세하게 표현되었던지 마치 제가 은수에게 헤어짐을 당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 마냥 그저 상우가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안타깝고 내가 괜히 막 미안해서..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어요.
내 속이 다 타버리는 것만 같고 내 속이 다 미어져버려서 눈물이 저절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거 있죠.
"라면 드시고 갈래요?"로 시작된 둘의 사랑이, 연애를 하는 동안 유난히 즐겨먹던 "라면"이, 이혼의 경험이 있는 은수에게는 사랑마저 "라면"과 같이 때때로 즐겨먹는 간식거리가 되어 버린 건 아닌가 싶었어요.
그리고 남아있던 소리...
강물 소리를 녹음할 때 같이 녹음 된 은수의 허밍.
상우는 사랑을 애써 잊으려 했지만, 결국 또 이렇게 소리만으로도 가슴 저미도록 사랑이 기억된다는 것을 상우는 깨닫죠.
그러나 상우는 결국 자신의 가슴을 찢던 사랑을 놓아버립니다.
기관사였던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잊지 못해 매일 기차역에 가 있던 치매 걸리신 할머니가 할아버지께서 기억하고 계신 하얀 양산과 하얀 옷을 입으시고 집을 떠나...할아버지의 사랑 곁으로 돌아가셨을 때...그때서야 비로소 상우도 사랑을 놓아버립니다. 늦게 은수가 향기로운 허브를 들고 다시 나타났을 때 상우는 말없이 향기를 가지고 온 은수를 밀어냅니다.
하지만 상우는 알았을거예요.
사랑이 변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온 사랑을 밀어내야 한다는 것을요...상우의 진짜 사랑은, 상우가 기억하고 있는 그 소리들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요.
이 말수없는 유지태,이영애만으로도 이 영화가 이렇게 따뜻하고 부족함 없이 슬프고 저미도록 가슴 아픈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유지태,이영애와 같이 내성적인 사람이 아니면 어울리지도 않았을 것 같은 나즈막한 사랑의 작은 소리들 때문이었다는 걸 저도 알 수 있었어요.
자연의 소리를 닮은 사랑의 소리....
눈발에 흔들리는 산사 풍경의 뎅강뎅강 소리,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 숲의 스스스 소리, 주루룩주루룩 제 목소리 내는 창 밖의 빗소리, 처얼썩처얼썩 가슴까지 철썩이는 파도 소리,
졸록졸록졸록 끝 모르고 흐르는 강물 소리....그리고 그녀의 발자욱 소리, 숨 소리, 웃음 소리, 옷 스치는 소리, 숟가락 잡을 때의 소리, 라면 깨는 소리, 나를 쳐다 보는 눈동자 소리......
자연의 소리도, 사랑의 소리도 내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하지만, 어디 봄날 뿐이겠습니까.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불쑥불쑥 찾아오는게 자연이고 사랑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사랑이 가면, 봄날만 가는 것이 아니라,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다 가는 거지요.
한참 감상에 젖어 눈물 펑펑 쏟고 있는데 당구치러갔다온 우리 신랑, 내가 눈물 범벅이 되어 있는 건 아랑곳 하지도 않고 부산스럽게 비닐봉지를 뒤적입니다.
"어? 무서운 영화1은 어딨어? 그거 보자, 얼른, 얼른."
네? 저는 저 감수성 왕 빵점인 우리 신랑하면 어떤 소리가 생각나냐구요? 딴 소리있겠습니까, 뻔하죠.
저도 대나무 소리나 풍경 소리를 듣고 싶은데, 우리 신랑은 아무 때고 발사하는 대포(방구)소리와 입으로 쏘는 방구(트름)소리 밖에 들려주지 않으니 아름답기는 커녕 성질만 나겠죠?
에구, 우리 신랑은 대체 사랑의 아름다움을 언제 알까요?
.....
제가 이렇습니다. 그저 삼류감수성만 살아있어서는 이런 사랑 영화나 봐야 영화랑 일체가 되니 이것도 고질병이죠.
하지만, 영화란 제 가슴에 남아야 좋은 영화 아닙니까?
그리고 아무 정보없이 내가 느낀대로만 써야 살아있는 영화감상문이 아닌가요? 영화, 이론적으로 따지고 보자면 제가 영화평론가 하지, 왜 여기 와서 수다 떨고 있겠습니까...여긴 그냥 감상방인데 말이죠^^
사족.
1. 은수와 상우의 사랑 뿐만이 아니라 상우 할머니의 사랑, 상우 아빠의 사랑, 고모의 사랑도 눈여겨 보시면 좋으실 것 같아요.
2. 이렇게 영화보고 복바쳐서 울어본 건,...시도 때도 없었지만 ...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라스베가스를 떠나며'가 떠올랐어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보면서도 얼마나 통곡을 했던지...
겨우 21살 대학생이었으면서도 세라와 밴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아프던지요...지금 다시 봐도 눈물 콧물 펑펑 흘릴거예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