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때 그리 많은 송편를 빚던 우리 며느리들.
이번 구정 때도 여지없이 밀가루 푸대 째 갖다 놓고 만두를 빚었는데.
큰어머님, 차별도 너무하지, 우리 작은 집 며느리는 밀가루 반죽하라 시키시고.
큰집 며느리들은 배추 다지기, 두부 으깨기, 숙주 삶기, 돼지고기 간하기... 그딴 애들 하는 일만 시키신다.
밀가루 반죽만 했냐고? 만만의 콩찰편!!
그 어마어마한 배추, 두부, 숙주.. 베보자기에 넣고 주물러 짠 건 바로 나!
그것으로 다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빚는 건 큰집 며느리, 미는 건 나!
힘 쓰는 일은 웬통 다 내가 도맡았다.
물론, 쌀집 아줌마 팔뚝을 자랑하는 내 신체적 이유도 그렇거니와 자기 며느리 아끼시려는 큰 어머니의 하늘과 바다만큼 깊고 넓은 배려(?) 덕분이 아닐까? 나 혼자 열쒸미 큰어머님의 정신분석을 해 본다.
아니면,
바로! 일 잘하는 나의 잽쌈? 집념? 끈기? 열정?
아니, 그것도 아니면 나의 설침?
몸부림스 아지메들 벌써 다섯시간 째 몸을 요리조리 비틀며 만두를 빚다가
이번에도 내가 또 대표 선수되어 큰 어머님 앞에 나갔다.
"큰어머님..."(허밍과 비음의 중간으로)
"온냐. 수정과 마시고들 혀라."
"녜... 큰어머님 커피 타드릴까요?"(이게 아닌데...)
"안즉 괜찮다. 니들이나 타 마셔라.저기 바"
"바카스 벌써 마셨어요. ...큰어머님, 우리 잠시 쉴겸 밖에 나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들어올께요."
"메야? 밖에 나가서리?"
"어~머~니임~~~... 제가 큰 동서 되서(나이로는) 아랫동서들에게 한번도 뭘 못해줬잖아요. 데리고 나가서 커피 좀 사주고 들어올께용. 네엥?"
"기냥 집에서 마셔라. 괜히 돈 쓰고..."
"축구도 전반전하고 15분 쉬고, 권투도 한 라운드 뛰면 잠시 쉬고, 애들도 40분 수업하고 20분 쉬잖아요. 저희도 쪼끔만 쉬었다가 할께요."
"그려려무나."
"딱 한시간만이요. 감사합니다. 동서들 준비해, 오케바리?"
그 순간 마주친 동서들의 벌려지는 입들... 꼭, 왕창 터진 만두같다.
그렇게 하야 시집 온 지 10여년만에 첨으로 제사음식하다 마실 나왔다. 아무리 일하다 급하게 나왔다지만 큰집 큰 동서, 봉두난발에 그 무참한 꽃무늬 쫄바지, 작은 동서는 머리에 허연 밀가루 묻히고, 난 더 가관이다. 무릎 나온 츄리닝 바지에 노란 고무줄로 질끈 묶은 머리에 사방에 기름칠, 밀가루 칠이니...
그대로 마늘까는 아줌마요, 주저 앉으면 그대로 부녀자보호소 행이다.
아무려면 어떠랴?
나왔으면 장땡이지.
오메~ 좋은 거. 살다가 이런 일도 있네요.
막내 동서 토끼같은 눈을 뜨고 연신 헤헤거린다.
우리끼리 좋다고 나와서 간 곳은 집 앞의 커피숍.
들어 와 달랑 커피 한잔 시켜놓고 너무 좋아 웃느라 어리버리 아까운 30분 그냥 지나갔다.
만두빚을 땐 그리도 지루한 30분이 왜 그리 빨리 지나간다냐.
큰집, 작은 집 며느리들 모여 앉아 시집 식구 흉보고, 남자들 욕했다고 생각하면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그냥 즉사시켰 뿐!!!
우린 단호하고, 깔끔한 만두부인들인 것이다.
어찌, 동네 커피숍의 철지난 크리스마스 반짝이 전구는 그리 총명하게 빛나고, 화초들은 잎사귀마다 반짝이는지...
집에서 듣던 조수미 노래는 귀신 울음인데 커피숍에서 듣는 조수미는 천상의 선녀노래며, 은쟁반의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다.
집에서 마시는 커피는 정신 번쩍 나라고 마시는데 나와서 마시는 커피는 뭔 무릉도원의 꽃향기인가? 향기롭기 그지없다.
그뿐인가? 가만 앉아만 있어도 자동리필이 되다니? 그것도 아저씨가 서빙를 하다니! 담 하나 너머의 세상이 이렇게도 다르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맥주도 마실껴?"
그 아까운 한시간이 거의 다 지나서야 누군가의 입에서 그 귀한 말이 쏟아졌다.
카~!
왜 그 생각 못했던가?
하지만 그 철통같은 한시간이 이미 지나가고 있었던 것을...
연애할 때도 생각치 못했던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하는 마음이 이렇게 간절할 줄이야.
다들 아쉬움에 떨면서 쟁반에 놓은 만두가 늘러붙은 듯 아쉽게 일어선다. 하지만 전쟁터같은 시댁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행님, 담엔 술도 마셔요."
"오케바리."
"행님, 담엔 노래방에도 가요."
"오케바리."
만두부인들, 집에 들어와 다시 자기랑 똑 닮은 만두를 빚는다.
난 맘 속으로 굳은 결심을 한다.
'담엔 꼭, 큰어머님도 모시고 같이 나가야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