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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1) 그여자의 결혼기념일


BY 녹차향기 2002-02-09

남편이 일하고 있는 종로통에는 여러가지 상점들이 즐비하지요.
물론 대로변을 차지하고 있는 굵직굵직한 등치의 유명상점들도
많지만, 불과 몇 걸음을 옮겨 그 뒤쪽으로 들어서면 인적도 좀 드물고.....
허름한 골목 안으로 촘촘히 박혀있는 여러 종류의 가게들이
징그럽도록 옹기종기 들어앉아 있기도 하거든요...

그런 골목에서 함께 얼굴을 맞대고 일 한 지 벌써 수년....
나이 차이가 조금씩 터울지는 것을 핑계로 형님, 아우하며 지내다가
모임을 만들게 되었고, 그 모임에서 결혼기념일을 챙겨주기로 했답니다.
장수삼계탕, 제주통도야지, 시민호프, 지상천국, 동해횟집, 암행어사
마산아구찜, 선일떡집, 금성화원,가빈동굴....
제목만 들어도 어떤 업종인지 쉽게 알 수 있는 이 가게 쥔장들이
바로 그 호형호제의 주인공들이지요.

어제 저녁.
집안 일을 다 마무리짓고 아이들 재울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남편의 다급한 호출이 있었지요.
'지금 얼른 챙겨서 나와야겠다...오늘이 '암행어사' 결혼기념일이래잖아..'
"그걸 왜 이제서야 말해요? 벌써 10시가 되었는데...."
찬바람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싫었고, 또 기껏 샤워까지 다 마친상태에서 화장을 새로 하고, 옷 갈아입고 나가기 정말 싫더군요.
"그래두 얼마전 우리집에 모두 몰려와 주었는데, 니가 안 나오면 너무 실례잖아..."
빚갚는다는 마음으로 무거운 발걸음으로 향했지요.

남편이 알려준 모임장소는 가빈동굴.
약속된 시간이 되자 속속 사람들이 도착하였지요.
손에 손에마다 각자의 가게에서 준비해온 음식들이 들려있었지요.
마산아구찜에서는 콩나물에 빠알갛게 양념한 아구찜,
시민호프에서는 먹음직스런 양념치킨과
선물로 케?揚?준비하셨구,
선일떡집에선 노랗게 콩고물 듬뿍 묻힌 인절미,제가 젤 좋아하는
약밥, 찰떡, 색색깔의 여러가지 떡들,
금성화원에서는 장미와 백합이 가득히 꼽힌 큼직한 꽃바구니,
가빈동굴에선 특유의 훈제바베큐 소세지,
준비된 테이블은 금세 고급 뷔페로 바뀌었지요.

어디서 이런 상차림을 만날 수 있겠어요?
케?恙?초를 꼽고, 두 부부의 결혼 14주년을 축하하는 인사말을 다함께 나눈 후,
건배를 했지요.
꽃바구니 전달식을 하고.....
서로 축하의 말을 하며 잔을 주고 받기를 몇차례 하던 중이었는데,
주인공인 '암행어사'의 부인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어요.

"어? 왜 그래? 왜 그래?'
다들 그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었고,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갑자기 조용해졌지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돌발상황이라도 발생한 것일까?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 결혼하고 오늘 처음 결혼기념일 챙겨보는 거거든요. 결혼하고 처음 결혼기념일이라구요... 정말 고맙습니다..."
암행어사 부인의 눈에선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어요.

옆에 있던 시민호프 부인께서 그녀를 꼬옥 안아주며 등을 다독여주었지요.
"야! 좀 잘 해주지 그랬냐? 너 생일도 안 챙기고, 결혼기념일도 안 챙기고, 그럼 쓰냐?"
호형호제하는 이들이 다들 한마디씩 하자...
"에~~~ 다 뽀롱내버리고 그러네..."
하고 암행어사 아저씨가 한마디 하셨지만 얼굴엔 안쓰러움이 한껏 묻어있었지요...

그래요....
그런 기념일마다 푸짐히 선물을 받아보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그날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못하는 남편들도 차암 많아요.
그리고 그렇게 장사에 매달려 정신없이 생활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하겠지요.
아주 사소한 것에도 우린 만족할줄 아는데....
암행어사 부인은 어제 실컷 취하고, 실컷 웃었어요.
술이 다소 센 그녀의 권유에 저도 거푸 몇잔을 비워내야 했었지만, 결코 밉지않은 그녀의 술주정이었지요.

헤어지는 순간까지 계속 감사하다, 고맙다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그녀의 손에는 아름드리 이쁜 장미꽃바구니가 들려있었어요.
한 일주일정도 그 장미는 그녀에게 말하겠지요.
평생 잊을 수 없는 첫 번 결혼기념일이었다구요..

2002. 2. 8. 늦은 밤에...



(*저의 컴백(?)을 기뻐해 주신 모든 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일일이 댓글을 달지 못해도 모든 에세이를 다 읽고 함께 웃고 함께 울고 있는 녹차향기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