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 설날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풍겨져 나오는 음식 냄새가
좋아서 괜히 기웃 거리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안방 장롱속에 고이 넣어둔 설빔을 꺼내서 만져보고는 다시
제자리에 두기를 여러번 해도 싫증나지 않고 좋기만 했다.
어느해 설빔으로 엄마가 빨간색 돕바와 남색 골덴바지를 사주었는데
입어보면 주위가 다 환해지는것 같았다.
엄마는 평소에도 밝은색의 옷을 잘 입혔다.
집에서 바느질을 해서 노란치마나 분홍색 원피스를 만들어 입혔다.
일년중에 설이 돼야 시장에서 두툼한 쉐타나 돕바를 사주었다.
단발머리에 비쩍 마른 몸매였는데 설빔을 입혀놓으면 제법 태 가 난다고 엄마는 흐뭇해 했다.
엄마는 설 에 쓸 음식을 준비하느라 몇일전부터 밤이 늦도록
부엌에서 달그락 그리며 일을 했다.
그때 마을에 하나뿐인 재철이 아저씨네 방앗간은 대목을 맞아
쉴새없이 굴뚝에서 검은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불린쌀 을 다라이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방앗간에
가서 길게 줄 을 섰다.
어른들은 집에가서 일을 해야 되니까 대신 아이들이 지켜서서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잘사는 집에서는 떡메로 내려쳐서 인절미를 만들고 돼지를
잡기도 했다.
아이들은 대문간에서 돼지 잡는걸 구경하다가 어른들이 못보게
하면 달아났다가 다시 와서 몰래 구경했다.
자야네 할매는 욕쟁이 였는데 우리가 몰려 다니기만 해도
"야이 망할것들아! 어서 집구석에 안가나!" 소리지르며
종 주먹을 대고 ?아오는 시늉을 했다.
앞니가 길게 삐져나와서 보기만 해도 무서웠다.
자야네 타작마당에서 "내 설 옷은 어떤 옷이다 네꺼는 뭐냐?"
서로 자랑도하고 숨바꼭질도 하고 고무줄 놀이도 했는데
자야 할매한테 들키면 영락없이 욕 을 한바가지 먹어야 했다.
설날 어른들 한테 새배하러 갈때면 자야 할매 한테 가는게
제일 싫었다.
가기 싫어 했다가는 엄마 한테 혼나므로 억지로 가서는 담너머로
기웃거리며 있다가 아이들이 오면 같이가서 얼른 새배만 하고
나올라치면 "야이 손아! 설에와서 맨 주디로 갈라카나?"
이러고는 손 이 또 올라온다.
자야 엄마는 얌전하고 말 이 별로 없었는데 할매 혼자 잠시도
입 을 가만두지 못했다.
엄마는 내가 나기전에 자야네 사랑방에서 셋방살이를 몇달간
했는데 별난 자야할매의 잔소리와 욕때문에 무리를해서
집 을 사서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도 어른이라 새배를 해야된다고 보내니 그때는 그게 왜그리도
싫던지 할매 얼굴만 봐도 무서웠다.
자야 동생 숙이가 할매를 닮아서 어찌나 성질이 드센지 여차하면
머리를 쥐어 뜯기는 수모를 당했다.
나도 한번 당했는데 속수무책이었다.
나이도 나보다 한살인가 어렸는데 여자 깡패가 따로 없었다.
자야도 맨날 동생한테 맞고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어린 마음에 꽤나 두려운
존재였다.
지금 자야와 숙이는 어떻게 사는지 궁금 할때가 있다.
어린시절을 함께한 동무들이라 보고싶고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