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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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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겨울이면 생각나는 사람.


BY 만년소녀 2002-01-20

이렇게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되면, 나의 생각 주머니의 한 쪽에 자리하고 있는 하얀 겨울처럼 시리디 시린 아픈 기억이 고개를 내밀어 나를 잡아끈다.
저 아픔의 저린 추억 속으로....

이십 여 년 전, 그 해 겨울은 내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겨울이었다.
올 겨울도 이십 년만의 맹위를 떨친 한파라지만 그때 그 겨울만큼 추웠던 겨울은 없으리라.

하얀 눈이 내리는 하얀 날, 하얀 병원에 누워 하얗게 시들어 가는 젊은 영혼은 오빠의 군 시절 화장실 청소 당번으로서 나에게 소개된 눈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대학을 다니다 군에 입대한 노주현씨를 닮은 아주 싱그러운 웃음의 소유자였으며 세상의 때가 하나도 묻어 있지 않은 천진한 마음을 가진 소년 같은 사람이었다.

우린 펜팔로 만남이 시작되어 이제 막 서로를 알아갈 쯤 그가'직장암'이라는 선고를 받고 군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통합병원에서의 그는 얼굴이 폭발물에 다친 친구랑 같이 환자복을 입고 나를 만나러 나왔고 우린 병원 안에 피아노가 있는 건물로 들어가 딩동 거리며 노래를 부르면서 놀았다.

그는 그의 친구랑 같이 제대 후에도 내가 다니는 교회에 와서 크리스마스 츄리를 도와주었고 광화문에 있는 극장에도 같이 가서 영화도 보았었다.
그때 거리에는 김 세화의 '눈물로 쓴 편지'란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건강이 안 좋아져서 서울 백병원의 의사선생님 권유로 수술을 위해 입원을 해야만 했다.
결코 낫게 되리라는 확신의 말씀을 가지고...

수술 전날 밤에 금식을 선포 받고 수술만 하면 나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아무런 걱정도 없이 장난 끼를 부리며 웃던 우리를 옆에서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빛들도 있었지만 우린 너무나 행복했었다.

경험되지 않는 아픔의 깊이를 모르기에 내일 당장 다가 올 고통을 앞에 두고 우린 웃을 수 있었으리라.

수술을 마치고 며칠이 지난 후, 병실을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여는 순간 난 보면 안 되는 것을 보아 버리고 말았다.
그의 어머님이 그의 허리에 찬 고무 패드 속의 대변을 청소하고 계신 것을...
아니 그와 눈이 마주 친 순간 그가 더욱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다.

그 날 이후, 그의 눈가림으로 우리의 만남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만남이 되어 버렸고 퇴원 후에 그의 집에 들렀을 때에서야 그것이 나를 위한 배려였음을 알게 되었다.

내일이 없는 자신을 포기하라는 마음에서 눈을 감고 나를 대하는 그 깊은 마음을...

그와의 만남을 난 아랑곳없이 생각했지만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다들 말리는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까지도..

어느 날 그를 지하철에서 보았다며 "예쁜 여자아이랑 손잡고 다닌다" 는 말에 "그가 그 지경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느냐는 나의 물음에도 "정말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그녀의 대답에 한편으론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와 나이가 같은 몇 달 빠른 사촌 누나겠 거니 하고서 나를 달랬다.

그땐 난 결혼을 생각하기엔 너무 어렸고 또 만남을 거절하는 남자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러나 마음만큼은 그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시리디 시린 아픔이었으며 그 시린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몰라 눈물로 가슴을 적시며 지냈다.

어쩌다 키가 훤칠하게 큰, 잘 생긴 남동생과 '현주'라는 이름을 가진 여동생과 마주치면 말 못 할 아픔을 눈빛으로만 나누었고 형용키 어려운 쓸쓸함에 나 혼자 먼 발치에서 눈물을 닦아 내야만 했다.
나를 예쁘게만 보아주시던 그의 부모님은 큰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할 슬픔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지...

많은 날이 지나고 그가 하늘의 부름을 받고 떠나는 날엔 곁에 있지 못했지만 그의 사촌누나를 통해서 그의 임종의 이야기를 들었다.

세검정 그녀의 집에서 우리 집으로 돌아오던 거리는 서울의 거리답지 않게 가을의 서정이 한 폭의 그림처럼 널려있었고 그 나무들의 스산한 바람소리는 가슴을 에이는 슬픈 노래가 되어 온 세상을 왼 통 눈물바다로 만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인생에서 가장 가혹한 형벌을 선고받은 사람의 처절한 아픔을 안고 하얀 나라로 날아간 하얀 천사 같은 사람.

그 사람이 떠나가고 나는 그가 못다 한 삶까지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나날이 바빴다.
그가 누웠던 병원의 옆자리에 못다 핀 청춘들의 자기 의지와는 다르게 무너져 내린 인생을 바라보면서 정말 그네들의 삶까지 다 살아 내고 싶었다.

난 아직도 삶에 대한 열정이 뜨겁다.

세상 끝까지 내 인생이 다 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늘을 살고 싶다.
비록 태산같이 큰 일은 못 이루고, 이름을 떨치는 큰 사람은 될 수 없어도...

열심히 산다는 것 ,그가 나에게 준 교훈이다.
그 교훈이 오늘도 나를 채찍질한다.

만년소녀의 아이디만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