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주부의 알.콩.달.콩
31. 만찬
만찬.
오늘도 난 오후 1시가 된 것을 확인하고 어김없이 도시락을 꺼냈다.
커다란 책상에 신문 광고지를 세심하게 깔고 보온 도시락통에 들어있는 반찬그릇, 밥그릇, 국그릇, 숟가락, 젓가락까지 한 상 가득 푸짐하게 펼쳐 놓고 점심을 먹는다.
오늘 식단은 해조무침과 조개젓, 계란후라이를 얹은 쌀밥과 냉이국이다. 계란후라이와 밥을 한 숟깔 퍼서 입에 넣고 아침에 다 못 본 신문을 넘겨가며 눈으로 훑었다. 은행금리가 어떻고, 20대 주부 방화범이 어떻고, 게이트가 어떻고, 한국 30대 남자의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어떻고....
계란후라이를 다 먹고 남은 밥은 조개젓을 빨갛게 묻혀 싹싹 비벼 먹었다. 매콤한 조개젓과 구수한 냉이국이 감칠 맛 도는게 정말 맛있다. "독자의 言"까지 읽은 나는 신문을 접고 상에 깔았던 광고지를 치우고 커다란 보온병에 가득 담긴 뜨거운 녹차를 한 잔 따라마셨다.
그러고나니 정확히 1시 30분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매일 즐기는 점심 만찬이다.
집에서 10분거리에 방을 얻어 공부방을 운영하는 나는,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쉼없이 수업을 진행한다. 시간마다 "선생님~~"을 외치며 공부하러 오는 꼬마친구들에게 도형의 넓이며 곱셈구구며 글짓기를 쉼 없이 가르치다보면 끼니를 챙기기가 어렵기도 하거니와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기도 어렵다. 그런 형편이다 보니 겨우 끼워넣은 30분의 점심시간은 나에겐 얼마나 즐거운 휴식시간인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30분의 점심시간이 만찬시간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내가 점심 시간마다 맛없는 빵조각이나 쫄면등으로 점심을 때우지 않아도 되게 해 준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바로, 신랑이다.
아침마다 늦게 일어나 겨우 10분 거리로 출근을 하면서도 허둥대는 나를 잔소리로 꾸짖으면서도 어느새 앞치마를 두르고 계란후라이를 만들고 있는 우리 신랑이 내 점심 만찬인 도시락을 싸 준다.
"점심 맛있게 먹어. 해조무침이랑 계란후라이는 다 먹고 조개젓은 짜니까 남겨. 그리고 국은 흘리지 않게 똑바로 놓고 뚜껑 열고. 그리고 녹차는 너무 뜨거우니까 한참 식혀서 마시고 밥 다 먹고 나면 웅웅웅웅하면서 물로 입 안 휑기고..."
"알았어, 알았어."
"그리고 끝나면 내가 갈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엉."
그리고 공부방 앞까지 안전하게 모셔다주는 기사 노릇까지 확실하게 끝낸다.
30살의 신랑은, 2개월째 실직을 한 상태로 요즘 재취업 준비로 바쁘다. 그런데도 신랑은 스스로 '한가한 백수'라 일컬으며 백수로서 아내 도시락 정도 싸주는 것은 본분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말이 '한가한 백수'이지 실직한 스트레스에 재취업 자리를 알아보느라고 발바닥에 땀난다는 것을 난, 누구보다 더 잘 안다. 그러기에 난 신랑이 실직을 한 것에 대해 가끔 미안해 하면,
"나는 당신이 집에서 살림하는게 더 좋은데? 내 도시락도 싸주고, 나 요즘 살 찌는거 다 점심 만찬 덕택이라구. 당신이 아니더라도 내가 도시락을 싸갈 수는 있지만, 그렇게 먹은 점심은 이렇게 즐겁지는 않았을거야. 난 당신이 싸준 계란 후라이만으로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만찬을 먹는게 되는걸."
하고 오히려 고마워 한다.
신랑은 실직을 하고 난 후로 내가 출근하고 나면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내가 부탁한 은행 업무나 전화국 업무를 보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내가 한껏 어지러 놓은 책상을
정리하거나 씽크대 안의 쓸모없는 그릇들을 정리하는 것도 프로급으로 변신했다. 지퍼가 고장 난 바지는 세탁소에 맡기고 약수터에 가서 물도 떠 온다. 인터넷과 고용센타에 가서 직장을 알아보다가 시간이
되면 나를 데리러 공부방으로 온다.
차를 타는 나에게 신랑이 처음 하는 말...
"점심 맛있었어?"
"엉!"
"이그...나 취직하면 이제 우리 여보 도시락은 누가 싸주냐..맨날 도시락 싸기 귀찮다고 떡볶이 사먹고 그럴꺼지? 내가 도시락 싸줘야 제대로 점심 먹을텐데...걱정이네?^^"
나, 눈만 꿈뻑꿈뻑.
...
나는 물론 신랑이 어서 직장을 구하길 바란다.
하지만 신랑이 직장을 구하면 난 신랑 말대로 맛없는 점심을 먹게 될텐데 그럴 때면 차라리 신랑
이 집에서 살림을 했으면 하는 욕심도 생긴다.
여보, 당신이 싸 주었던 따뜻한 도시락은 내 평생 잊지 못할 가장 맛있는 만찬일거예요.
직장을 늦게 구하게 되더라도 조바심 내지 말고 용기 잃지 말아요.
난, 당신이 직장을 구할 때까지 가장 힘이 되는 정신적인 만찬이 될게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