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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의 나이에...


BY 소나기 2000-06-25

남편은 성실하고 착하다. 자신의 직장이 천직인 줄 알고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다닌다. 내가 이따금 돈타령을 하면 주어진 대로 살면 되는거라고 들은척도 안한다. 두 아이도 특별한 문제없이 잘 자라고 있다. 물론 욕심대로하자면 평범한 아이들에게 불만이 쌓이지만 그것이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을 절감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봐 주는 것으로 마음수양이 되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언젠가부터 부유하는 구름처럼 허랑하기만하다. 도저히 마음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불혹에 들어서면서 난 치열하게 살아왔던 삶에 대한 전의가 상실 되어버렸다. 물려받은 재산 하나 없이 남들처럼 보란듯이 살고 싶어 앞만 보고 악착스럽게 살아왔다. 이따금 친척들의 대소사에도 적당히 빠지면서까지 설정한 목표를 위해서 깍쟁이처럼 살아왔다. 그러면서 아파트도 장만하고 제법 알부자라는 소리도 들어면서 난 비로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나 했었는데......
빌어먹을 아이엠에프가 돌풍처럼 불어닥치더니 남편의 월급이 대대적으로 깎이고 그때부터 내 가계부는 빨간숫자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흑자는 안녕을 하고 적자로 돌아선 것이다.
그때의 황량한 기분이란......
세상일은 정말 자기 뜻대로 안되나보다. 난 '뿌린대로 거둔다'는 격언을 신념처럼 믿었다. 절약하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인생은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절감했다. 이젠 가계부는 더 이상 나의 장미빛 꿈을 실현시켜 주는 요술상자가 아니다. 단지 삶의 지친 모습이 너덜너덜 묻어나는 기록일 뿐이다. 내가 노력해도 한계가 보이는 숫자 앞에서 허탈감만 묻어난다.
난 요즘 심한 자아 정체감에 시달린다.
불혹의 나이에...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밤기차를 타고 정동진에나 한번 다녀와야겠다. 동행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고향처럼 푸근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난 주어진 나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부족함 속에서도 따뜻함과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심안의 지혜를 터득하고, 바라만 보아도 시원하다는 경쾌함과 똑 부러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되찾아 오고 싶다.
그리고 이젠 정말 정체감에 대한 혼란은 접고 싶다.
불혹의 나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