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강력범죄와 아동 성범죄자들의 처벌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35

어느날 오후


BY Suzy 2000-10-20

한가한 오후, 전철 안에는 제법 앉을 자리도 있었다.

가을 하늘은 약간 흐렸고 바람은 쌀쌀했다.

"역시 잘했어"
빈자리에 앉으며 내 차를 두고 전철을 선택한 자신에게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잠시 후, 텅 빈 통로를 장난감 미니 자동차가 구르는 대로 따라서 뛰어 다니며 소리를 질러대는 대 여섯 살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분위기를 깼다.

그 아이 보호자는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이는 내 맞은편에 앉은 젊은이 발 위로 펄썩 넘어진다.

다시 장난감 차를 따라 어느 아가씨의 다리 밑으로 기어 들어가 기웃거린다.
신문 보는 아저씨 무릎에 엎어지기도 했다.

다시 큰 소리를 질러대며 내 앞까지 뛰어 왔을 때 건너편에 앉았던 아저씨가 눈을 크게 떴다, "야!"
아이는 움찔 하더니 그대로 가 버린다.

그 아이가 커서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제서야 난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갖었다.

내 옆에 앉은 수녀복 같이 검고 긴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
아까부터 휴대폰에 문자를 찍느라 골몰하고 있다.

건너편 젊은이도 역시 휴대폰을 손에 들고 눌러대고 있다.

눈을 조금 멀리 돌리니 세련되게 차려입은 젊은 아줌마, 휴대폰을 볼에 대고 열심히 입을 움직인다, 통화중!

끊임없이 확인해야하고 누구라도 목소리를 들어야 안심할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어디선가 휴대폰 벨이 울린다, 모두들 자신의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그들은 누구를 기다리는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많은 현대인이 조울증에 시달리는 것은 항상 "기다림"으로 지쳐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들의 외로움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찡하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바닥을 앉은 채로 손으로 밀고 다니는 나이든 걸인여자-- 넓은 바지통 속으로 힘없는 두 다리가 흐늘거린다.

저쪽의 아저씨가 1000원 지폐 한 장을 건넨다.
꿉벅, 인사를 한 그녀는 눈길도 안 주고 돌아선다.

나도 동전 몇푼을 주었다, 여전히 꿉벅!
몇몇 사람들은 어느새 잠이 들었나보다?

눈감고 있는 그들 곁을 그녀는 바삐 지나간다.

타성에 젖은 듯 한 그녀의 구걸행각이나 잠든척하는 사람들이나 입맛이 쓰긴 마찬가지다.

내 옆에 젊은 아가씨 둘이 새로 탔다.
"아- 짜증나" 그녀들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챗팅하던 얘기, 그리고 다시 "아- 짜증나" 그대로 옆에 있는 내 귓가에 꽂힌다.
"그 xx 디럽게 똑똑하더라, 아- 짜증나 쓰발"

저속한 대화 내용과 단조로운 어휘, 별로 맛갈스럽지 못한 욕설---
그리고 말끝마다 붙는 "짜증나" 아- 정말로 짜증난다!

난 드물게 그녀들의 가방 끈 길이를 쟀다.

차가 멎길 기다려 내리려 하니 손에 마실 것을 높이 치켜든 "아줌마"들이 먼저 들이닥친다.
손톱에 검은 메니큐어칠을 한 그녀의 손에는 과자봉지가 게걸스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녀들을 뒤에 두고 내릴 수 있어서 천만 다행이다.

"무언은 긍정이다" 그렇다면 난 그들 모두를 받아들였는가?
비겁하게 입 다물고 정의를 외면 한 것은 아닐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깨우쳐 줄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닐까?

알고도 모른 척, 보고도 못 본 척, 난 그들 모두의 공범은 아니었을까?
나도 별수 없이 무관심에 길들여진 소시민일 수밖에 없었다.

밖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난 정시에 약속장소에 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