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면서 사이좋게 잘 지내는 형제도 있지만 그 중에 서로 앙숙관계도 있기 마련이다.
작은 언니하고의 사이가 그랬다.
작은 언니는 ‘곰’과에 속했다면 나는 ‘여우’과에 속했다.
자연 큰 언니나 집 안 어른들의 사랑은 내가 차지하기 마련이었고 작은 언니 입장에선 그 것이 못내 못 마땅했을 것이다.
지금도 작은 언니에게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내가 타고난 여우였던 것은 내 탓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 나는 우등상을 받지 못했다.
언니 둘이 학교 다니는 동안 우등상을 못 받아 오는 불상사는 일어난 적이 없었던 일이다.
“우리 아이 말에 의하면 자기 보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도 우등상을 받았다고 하던데요?…”
놀란 어머니가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물었단다.
”어떻게 결석한 날 수가 40일이 넘는 아이를 우등상을 줄 수 있겠어요?”
어머니 말에 의하면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왜 그렇게 많이 결석했을까?’
이 의문은 한 동안 내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결혼 후 미국에 가서 10년을 살다 잠시 귀국했던 작은 언니의 말을 듣고, 드디어 그 의문이 풀렸다.
“학교 가는 길에 한 대만 쥐어 박아도, 울면서 집으로 돌아 가서, 나만 또 혼나게 만들고…”
내게 대한 언니의 해 묵은 불평이었다.
비로소 내가 최초로 정근상을 받은 것이 왜 4학년 때였는지 이해가 되었다.
언니가 중학교에 가고 더 이상 나하고 같은 학교를 다니지 않게 된 해였다.
자다가 갑자기 방바닥에 머리가 쿵 떨어져 잠을 깬 적도 있었다.
잠 버릇이 곱지 못했던 언니가, 자다가 베개를 잃어버리고, 내 베개를 낚아 채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언니는 항상 심통이 나 있었다.
그래서 별명도 이런 것들이었다.
새때기, 만지면 손에 피가 나는 억새풀을 일컫는 우리 고향의 사투리다.
불독, 사납기로 유명한 개다.
풀쐐기, 스치기만 하면 가렵고 따끔거리게 하는 벌레 이름이다.
어른들은 언니를 그런 별명으로 불렀다.
그 언니의 심술은 바로 밑의 동생인 내게로 쏟아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결코 호락호락 만만한 동생이 아니었다.
든든한 후원을 등에 없고 언니에게 겁 없이 덤비는 동생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른들은 곰 같은 언니보다 여우 같은 내편이 될 수 밖에 없음을…
여우 같은 나는 어른들에게 미움 받지 않고 일러바치는 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큰 언니와 어른들의 동정을 이끌어 낼 줄 알고 있었다.
곰 같은 언니가 제대로 변명도 못하고 화가 나서 씩씩거릴 동안…
지금 생각하면 언니가 얼마나 속상했을까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 땐 날 못 살게 구는 언니가 밉기만 하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많이 속상해 하였다.
툭하면 싸우는 우리 둘 때문에…
집집마다 나름대로 그 가족들의 공통된 특성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가족의 공통점이라면 끈기가 부족한 것을 들 수 있다.
주어진 환경에 쉽게 안주하고, 고통을 참고 견디어 더 나은 환경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욕심이 없고, 나쁘게 말하면 발전이 없는 사람들이다.
작은 언니는 이런 우리 가족 중에 조금은 별종이었다.
공부도 잘 하고 싶어했고, 옷도 잘 입고 싶어했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하기도 하였다.
최근에 만난 작은 언니는 역시 가족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작은 언니는 자신을 욕심도, 끈기도, 발전도,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지도 모른다.
우리 가족과 비교해서 욕심이 있다는 것이지 남과 비교하면 작은 언니도 우리 가족 공통의 특징을 가진 사람중의 하나일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작은 언니는 공부를 잘 했다.
초등학교의 졸업식에서, 최고의 영예였던 교육감 상은 으레 남학생 차지였던 시절, 최초로 교육감 상을 받아 낸 여학생이었다.
대학 입학 예비고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신문의 기사거리가 되었다.
중학생도 드물던 가난한 시골 동네에서 장학금을 받고 최초의 대학생이 되었다.
미국에 유학하고 박사가 된 언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랑거리였다.
돈이 없어 고등학교도 보낼 수 없다던 아버지에게, 장학금으로 공부할 테니 원서에 도장만 찍어 달라고, 울면서 사정하던 언니가 이루어 낸 쾌거였다.
중학교도 가기 싫다고 떼쓰던 나하곤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부모님이 논을 팔아서라도 자식들 공부 시킬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작은 언니의 기사가 신문에 난 후였던 것 같다.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할 땐 부모님의 반대가 없었다.
오히려 싫다는 날 구슬러 대학 시험을 보도록 하였다.
그런 부모님에게 죄송한 일은 난 작은 언니하고 달랐다는 것이다.
공부가 재미 있었던 적도, 열심히 할 마음도, 내겐 없었다.
열심히 공부한 작은 언니 부부는 모두 박사가 되어 켄터키 루이빌에서 살고 있다.
널따란 잔디밭 위에 세워진 그림 같은 집에서…
방이 여섯에 화장실이 다섯인 저택에서…
몇 해 전 큰 언니가 작은 언니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이웃에 살던 미국 여자가 작은 언니에게 물었단다.
“Is that your foxy sister?”(여우같다는 그 동생이냐?)
언니가 아니라고 따로 있다고 했단다.
언니는 어른이 되어도 여우 같은 동생에게 당하고 산 것이 잊혀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미국에 가서도 이웃 여자에게 날 여우라고 한 것을 보면…
그래도 내가 찾아가면 무엇인가 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다.
더 많이 해 주지 못해 섭섭한 표정이 얼굴 가득하다.
그 마음이 바로 가족을 이어주는 끈인가 보다.
미운 정이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하고…
이틀이 멀다 하고 싸우고 자란 언니지만, 언니를 생각하면, 내 가슴에 흐르는 것은 미움이 아니고 그리움이다.
언니가 날 못 살게 굴던 그 추억조차도 따스하게 느껴진다.
언니가 날 여우 같다고 하는 말에 화가 나는 게 아니고 즐겁기만 하다.
‘그래, 언니 말이 맞아. 내가 진짜 여우였었지.’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면 훨씬 더 교활한 여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니지, 한 번쯤 고분고분하고 심술도 고스란히 받아 줄 아량도 있는데…’
그러나, 그런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
심술궂은 언니가 있었어도 가족이 모두 모여 살던 그 날이 그립기만 하다.
심술쟁이 언니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