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열 한두살 무렵
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 이십여년전 일이다,
그때만해도 아이들의 군것질거리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학교 앞 문방구나 동네 구멍가게에는
항상 딱지 모양의 뽑기가 코흘리개 아이들의
단골 메뉴였었던 시절.....
십원하던 별모양의 '딱따구리' 과자
이십원하던 꼬불꼬불 라면과자와 혀끝에 닿기만해도
달콤한 별사탕이 들어있던 황홀했던 '자야'
그 때는 요즘 아이들처럼 용돈이 흔하지 않을 뿐더러
부모님께 무얼 사달라고 때를 쓸 줄도 몰랐던
순진한 시절이었다.
그 당시
나는 왜 그리 생라면이 좋았었던지
어쩌다 용돈이라도 생기는 날이면
부리나케 머리를 휘날리며
동네 구멍가게로 가서 뽑기를 하곤 했었다.
뽑기에는 항상 라면이 들어있었는데
그건 거의 뽑을 확률이 아주 낮은 물건이었다.
어쩌다 운 좋게 라면이 걸리는 날이면
세상을 다 얻은 사람 마냥
마구 흥분되고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바삭바삭하고 고소한 라면에
매콤한 스프를 넣고 봉지째 흔들어서
먹는 맛이란......
어린 시절
우리들의 간식으로 생라면은 정말 왓따였었다.
어쩌다나 감질나게 생라면 과자를 먹던
어느날.....
아버지가 라면 한 박스를 사오셨다.
여동생과 남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정말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한두개도 아닌 한 박스를 사오셨으니 왜 아니 좋았겠는가...
며칠동안
맛있게 끓여도 먹고 생으로 부셔도 먹고
라면 덕분에 학교에서 돌아 오는 발걸음도 신났었으니까.....
그러던 어는날
아버지께서 우리 남매들을 불러 모으셨다.
"너희들 라면 생으로 먹던데...앞으로 날것으로 먹지마라."
"라면을 끓여서 먹어야지 날로 먹다가 배탈 나면 큰일이니까...
알아 듣겠지..."
"네 ...아버지 ."
나를 비롯해서 동생들도 생라면을 좋아했던터라
아버지 말씀이 맘에 들진 않았지만
그당시 호랭이 같던 아버지의 말씀이니
토도 달 수 없이 다들 그러마 하고 대답을 했다.
하루 이틀은
어찌 참아 보련만 시간이 흐를 수록
다락 계단에 올려져 있는 라면 박스에
자꾸만 눈길이 자연스레 가는건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집안엔 아무도 없고 나 혼자만 있게 되었다.
'라면 한개만 먹어...
아냐~~아빠가 생라면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럼 안되지...'
'한두개 먹는다고 티도 안나는데 먹어버릴까...'
이렇게 내 맘속의 천사와 악마가 서로
싸움을 하다가 급기야
먹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씀보다
라면이 가까이 있기에 나는 그만
쥐도 새도 모르게 손을 대고 말았다.
그렇게 한번 두번 ......
먹어도 먹어도 마를지 않는 샘이 아닌
라면 박스였기에 점점 비어가는 공간이 많아 질 수 밖에....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동생들도 다들 긴장해 있고 아버지의 표정도
어두워져 있는 모습이 왠지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 듯한 기세였다.
우리들을 불러 모으신 아버지....
"너희들 아버지가 라면 생것으로 먹지 말라고
했었지..."
"네 .....아버지..."
"근데 ...누가 먹은거냐..?
"........."
"너희들 대답 안할거냐...?"
"............."
"배탈난다고 먹지 말라고 누누히 말했는데
아빠 말도 듣지 않고 .....
어서 대답해봐 ...누가 먹은거야..."
"......."
우리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겁먹은 쥐마냥
고개만 푹 숙이고 앉아 있었다.
아무 죄도 없는 동생들을 생각하면
빨리 자수를 해서 죄값(?)을 치뤄야 하건만
여기서 불었다간 다리 몽댕이가 남아 남질 않을것 같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너희들 다 회초리 맞는다..."
한차례의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여동생이....
"아빠.......제가 그랬어요...
잘못했어요......다신 안그럴께요..."하며
울먹이는 것이었다.
나는 속이 탔다.
내가 그런걸 동생이 뒤집어 쓰다니.....
빨리 내가 그랬다는걸 이실직고 해야하는데....
어린 시절
아버지의 교육관은 우리들이 잘못을 했을 경우
회초리로 교육을 하시던터라 겁이 덜컥 났었던 연유였다.
동생은 우리, 아니 나를 대신해서
몇대의 회초리를 맞곤
방으로 돌아와 우리를 보며 원망의 눈빛으로
빨리 자수하라며 엉엉 울었다.
첨 부터 말했으면 모르겠으나
동생이 회초리까지 맞고 나니 더욱 미안한 맘에
끝까지 난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렇게 의문의 생라면 사건은
잊혀져 가는가 했는데...
내가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날 오후였다.
띠리리...띠리리...
방송국이라며 전화가 왔다.
"여기 케이비에쑨데요....
동생분이 사연을 보내셨는데....
예전에 생라면 사건이 있었다는데...
아무래도 언니가 범인(?)같다는군요...
오늘 이 기회를 통해서 진실을 밝혀 주셨으면
한다는 군요....."
순간 난 넘 당황스런 감정에 휩싸이면서
이제는 진실을 밝힐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 방송 작가라는 사람과
대화가 길어질 수록 어딘가 낯익은
목소리라는 미심쩍은 느낌이 자꾸 드는것이었다.
"혹시 00씨 아냐~~"
"......"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깔깔깔 하는 폭소가 터지는 것이었다.
회사 직원을 시켜 장난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동생의 목소리...
"언니~~이제 진실을 밝혀~~~
내가 어렸을때 얼마나 억울했었는 줄 알아...?"
그 순간 난 정말
진실을 폭로 할뻔 했다.
"야~~난 절대루 아니다..생사람 잡지마...."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생라면 사건은
우리의 기억속에서 흐려져 갔지만
그 당시 억울한 고초(?)를 당한 여동생은
절대 잊혀지지 않는
의문의 사건이었는지
가끔씩 모이게 되면 우스게 소리로
나와 남동생을 문초하지만
난 끝까지 아니라고
지금까지 발뺌을 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 가족 모두가
증거만 없을 뿐 심증은 모두 나를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것을 이십여년씩이나
비밀로 하고 있었나 하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 심각한 일이었던지
진실을 말 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었다.
'00야~~미안해
그때 범인은 바로 이 언니였어~~
지금이라도 용서해 줄거지....?"
'내가 너 라면 평생 대줄께... 비겁했던
언니를 한번만 봐줘라......'
그렇게 살신성인 했던
여동생은 지금껏 시집도 안가고
나를 속썩이며 붙어있다.
그날의 비겁함이 이렇게
큰 업보가 될줄이야........
전 지금도 심심하면 생라면을
종종 부셔 먹곤 하는데
울 딸이 날 닮아
똑같이 생라면을 좋아하네요.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구하나봐요....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