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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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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찜해도 아이스크림은 달콤해


BY 칵테일 2000-10-19




찜찜해도 아이스크림은 달콤해



예나 지금이나 남자가 바람피우는 걸 그냥 두고 보는 여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성격이라,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반응이 나오는 데, 제가 아는 이 중에 참으로 특이한 이가 있어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꽤 오래된, 몇 해 전 일입니다.
한 아파트에 저와 나이도 동갑인 친구가 있어, 그 당시는 그 친구와 각별히 친하게 지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제가 그 집에 놀러가니, 그 친구가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답니다.

제가 이유를 물었지요.
그 친구, 얼굴도 부실부실한 게, 지난 밤 잠도 설치지 않았나싶은 딱한 안색이었어요.

처음에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더니 거실 장식장 서랍에서 무언가를 부시럭 부시럭 꺼내더군요.

양말이었어요. 하얀 면에 BYC라고 씌여있는 평범한 여자용 면양말 한 짝을 꺼내 보인 것입니다.

사연인 즉, 간 밤 그 집 남편이 외박을 하고 그 날 신새벽에 들어 왔는데, 글쎄..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들어왔답니다.

한 짝은 제대로 남자용 BYC 흰 면양말을 신었는데, 다른 한 짝은 문제의 여자용 양말을 신고 들어왔다는 이야기.

정작 들어와 벗어놓을 때는 몰랐다가 아침에 남편이 출근하고 세탁기에 넣으려다가 발견한 모양입니다.

거기까지 들은 저는 단순하게 생각해서, 그저 그 집 남편이 제 친구의 양말을 잘 못 신고 나갔다온 줄만 알고 듣는 순간부터 마냥 깔깔대기 시작했었죠.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 친구는 글쎄 하얀 색 BYC 양말을 신지 않는다지 뭡니까.

그 때가 마침 여름이었고, 그 집 남편이 유독히 무좀이 심한 편이라 평소 양복차림임에도 불구하고 여름에는 흰 양말을 신는대요.

그래서 자기의 양말과 혹, 섞일까봐 자신은 절대로 흰양말을 신지 않는다는 이야기였어요.

흰양말을 신는대야 기껏 접는 부분에 레이스처럼 모양을 낸 커버양말이나 신을까, 그야말로 '절대로' 여자용 흰 양말은 아예 사지도 않는다는군요.

그러니 그걸 발견한 순간 얼마나 그 친구가 놀랐겠어요?

그리고는 신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인간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 밤새 포카치고 왔다더니 어디가서 쌩바람을 피고 온 모양이다.... 어쩌구하면서 성토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땐 누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그냥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수밖에는 없지요. 저도 그랬답니다.

급기야는 울기 시작하는데, 참 난처하대요.
그 집 남편은 인물도 좋은 편이고, 성격도 서글서글해서 비교적 '괜찮은 남편'으로 알았는데 저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무척 놀랐지요.

남자가 백날 괜찮으면 뭐합니까.
밖에 나가 바람이나 피고 돌아다니는 위인보단 차라리 이주일씨나 정부미(?)씨가 훨씬 낫지요.

그렇지만 제가 그 앞에서 그 친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구구절절할 수 있겠어요?

내 남편은 바람이란 아예 바람의 "바" 자도 모른다고 자랑을 하겠어요, 아니면 우리집 이 인간도 어쩌면? 하고 엉뚱한 사람까지 물고 들어가겠어요?

그냥 우는 걸 어떻게 대충 달래놓고, 저도 우울해져서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죠.

그리고 며칠 뒤.
그 친구가 커피나 같이마시자고 건너오라고 하더군요. 안 갈 수 없잖아요?

어떤 표정으로 있을까,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갔습니다.

그런데 시무룩해하기는 커녕 의외로 표정이 밝고 편해요. 아, 아마도 오해였던게지. 그게 풀렸다보다 싶어 제가 물었어요.

그랬더니 정말 황당한 대답이 나오네요.
어떻게 된 거냐고 다그치니까 사우나에서 아마 바뀐 모양이라고 하더래요.

우리나라에서 대중 사우나가 남녀 혼탕이란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럼 남자들 중엔 여자용 양말을 신고다니는 위인도 더러 있는 모양이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 자기 락카가 있는 거고, 어떻게 양말이 남의 것과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저로서는 아리송하대요.

그렇지만 그 친구는 그것도 변명이라고, 남편의 말을 믿고서 훌쩍 오해를 풀었는지 오히려 그 친구가 이해가 되지 않던대요.

하지만 그 친구가 뒤이어 하는 말엔 그야말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그렇게 그 친구가 따지고 난 이후, 그 집 남편은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한 통씩 매일 사들고 온답니다.

그것도 작은 통이 아닌 커다란 통으로 하나씩말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그즈음 매일 그 커다란 아이스크림을 아예 통째로 끼고 앉아 먹고 있었다는 이야기.

그러니 그 친구가 괜히 살찌는 게 아니었어요.
외모가 못난 쪽은 아니었지만, 체중은 실히 장난이 아니었거든요.

국산 브래지어는 아예 사이즈를 찾을 수 없다는 불평을 들은 일이 있는데, 그 살이 그냥 찌는 물살이 아니더라구요.

그러면서 자신도 계속 '찜찜'하다는 거에요. 하지만 어쩔거냐고 오히려 제게 묻더군요.

그래도 요즘처럼 이렇게 자상하게 대해주니 불행중 다행이라나 뭐라나. 제 입이 딱 벌어졌답니다.

제게 만약 그 상황이 벌어졌다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남편이 밥숟가락을 놓던지 제가 놓던지, 둘 중에 하나가 요절이 나야 끝이 나지 않았을까요.

남편이 바람을 피운 것 같은 심증이 감에도 불구하고,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에 자신의 의지와 타협하고 만 그 친구는 왜 그랬을까요?

지금은 서로가 다른 곳(산본과 분당)에 살고 있어 연락이 뜸하지만, 지금에와서 생각해보니 그때와는 제 생각이 조금 다르네요.

제 친구는 아마도 남편에 대해서 나름의 '포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굳이 이혼할 것도 아닌데 서로를 부대끼게 할 게 뭐있을까 싶은 심정.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다고, 어쩌면 혼자 다 삭이지 못할 만큼 마음속에 아픔을 담아두면서도, 그렇게 자신을 왜곡해서 남에게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 일 이후, 그 친구는 서둘러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거든요.

자존심. 아마도 자존심때문이었을 거에요. 나를 비롯한 몇 몇 친한 동네여자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못내 힘겨웠을 거에요.

자신이 화가 나서 이 사람 저사람에게 그 사정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 말을 들은 뭇 사람들이 그 이후 자신의 남편을 쑥덕거리며 보고 대하는 게 더 힘들었을테니까요.

70킬로에 육박하는 육중한 몸에도 불구하고, 대전 엑스포에 함께 갔을 때 우리 일행을 놓치고는 눈물 범벅이 되어 있던 그 친구.

그날 밤 그 친구와 자는데, 아이처럼 내 손을 꼭 쥐고 잠들던 겁많은 친구.

그렇게 마음 여린 친군데, 남에게 말못할 그 아픔이 오죽했을까요.

아이스크림이 달콤해서가 아니라, 그렇게해서라도 아픈 생각을 잊고 싶은 그 친구의 노력이었겠지요.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가끔 생각납니다.



칵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