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발의 무좀이 심해서 농사일을 전혀 할 수 없던 때가 있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심해지면 생명이 위험해 질 수도 있으므로 양 쪽 발을 잘라야 된다고 하였다 한다.
그런 정도로 심했다.
다행이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아버지가 그 의사에게 치료 받는 것을 거부하는 바람에 아버지의 발은 무사했다.
무책임한 의사였다.
그 후 아버지는 삼 십 년을 그 발로 잘 돌아 다니다 돌아가셨으니까…
그러나 그 때는 우리 가족에게 커다란 시련의 시기랄 수 있던 때다.
나도 다니던 중학교를 그만 두고 서울로 가서 양장점 심부름꾼이 되어야 했다.
공부가 하기 싫었던 나는 얼씨구 좋다고 생각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얼마나 철없는 생각이었는지 깨달았지만…
아무튼 아버지가 농사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우리집 농사일은 자꾸 밀릴 수 밖에 없었다.
모내기도 그랬다.
서로 품앗이로 모내기를 하던 때라서 품앗이를 할 사람이 없는 우리집 모내기는 자연 뒤로 밀렸다.
어머니는 모내기 품앗이를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모내기 하는 손이 빠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워낙 솜씨 좋은 농사꾼이어서 어머니까지 나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모내기가 아니라도 어머니는 바빴다.
동네에서 밭농사가 가장 많았던 것이다.
모심을 때가 된 논을 바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어느 일요일 아버지를 제외한 식구가 모두 모내기에 나섰다.
어머니, 언니 둘, 나, 동생 이렇게 다섯이서…
그리고 같은 동네에 사는 막내 외삼촌이 그 날은 다른 집 일을 가지 않고 도와주기로 하였다.
그 중에 모내기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외삼촌을 제외하곤 없었다.
아버지는 논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신발을 신을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논 둑에 와서 지켜보고 있었다.
거머리가 많은 논이었다.
유난히 거머리가 많은 논이 있는데 그 논이 그랬다.
“에구머니나~”
먼저 큰 언니가 비명을 질렀다.
다리에 붙은 거머리를 발견한 것이다.
손에 들고 있던 모를 내던지고 비명을 지르며 논바닥을 뛰어다녔다.
우리들이 서툰 솜씨로 간신히 모내기 한 곳을 뛰어다니며 모두 망치고 있었다.
큰 언니 비명에 작은 언니도 자기 다리를 살폈다.
그 다리라고 다를 리 없었다.
거머리가 두 마리나 붙어 있었다.
“엄마아~…”
작은 언니가 우는 소리를 하며 손에 든 모를 내던졌다.
그리고 어머니 등 위로 기어올랐다.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니 어머니보다 덩치가 훨씬 큰 작은 언니였다.
두 언니의 하는 양을 보며 내 다리를 흘끔흘끔 살폈다.
아직 내 다리에는 거머리가 붙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언니들을 마음껏 놀리고 웃었다.
“어! 여기도 붙었네. “
자기 다리를 살핀 동생이 말했다.
그래도 남자라고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손으로 거머리를 잡아 뜯더니 아랫논에 휙 던져 버렸다.
농사일에 익숙한 농사꾼 마냥…
언니들은 집으로 들어갔다.
가서 밥이나 하라고 어머니랑 아버지가 쫓아버렸다.
도움이 되기 보단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나중에 내 다리에 거머리가 붙었을 때 난 언니들처럼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악!~’소리가 입 밖에 나오려고 했지만 꿀꺽 삼켰다.
그렇지만 동생처럼 손으로 거머리를 잡고 뜯어낼 용기까지는 없었다.
그저 징그럽고 끔찍했지만 꾹 참고, 논흙을 한 웅큼 집어서 쓱 문질렀다.
언니들을 놀리고 비웃은 죄가 있었기에…
어머니, 아버지, 언니들, 동생, 모두 모여 깔깔거리고 웃던 때가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힘 들고 가난했을지라도…
이제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저 세상으로,부천으로, 미국으로, 서울로, 전주로…
그렇게 서로 따뜻한 감정을 느끼며 사는 인간관계를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 시절을 떠 올리기만 해도 이렇게 가슴이 벅차고 코 끝이 찡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