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나는 '졸음과의 전쟁'을 하고 있다.
책상머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뻐꾸기 시계소리에 억지스레 눈을 뜨고
시계를 쳐다보았다.
밤 12시다.
'에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됐네. 아~~~~~~~~~~웅'
긴 하품을 하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책상 위엔, 회화 테이프가 꽂혀있는 카세트와 마시다만 커피가 놓여있고,
영어회화 교본, 사전, 연습장이 널브러져 있다.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며 책상위로 멍하니 시선을 옮겨 놓는다.
'도대체 지금 내가 뭘 하는 거지? 이 나이에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마지막 잎새처럼 달랑 한 장 남은, 12월의 달력이 괜시리 못마땅하다.
내 나이 서른 아홉, 보름만 지나면 마흔 줄로 들어선다.
서른 아홉과 마흔.
여자나이 스물 아홉에서 서른으로 접어드는 것과 서른 아홉에서 마흔으로 접어드는 것은,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그나마 서른은,
뭇 남성들의 시선을 받아도 어색치 않게 웃을 수 있고,
아직까지 할 일이 남아 있으며, 인생의 희망이 남아있는 나이다.
하지만 마흔은,
이 한 몸 희생하여 업고 보듬고 살비비며 키운 자식들은 엄마를 피하려 들고,
거울에 비친 얼굴에선,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누가 깊게 패이나' 내기하고 있고,
옷안으로 구겨 넣어도 비죽비죽 삐져 나오는 살집들은,
책 두께냐, 사전 두께냐, 하며 서로 경쟁하고 있고,
기껏 공들여 화장하고 차려입고 나가도 누구하나 눈길 주지 않는.....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나이다.
그래도 어떤 집의 남편은 머리통 커진 자식들보다 마누라가 최고라며
뒤늦게 신혼기분 낸다는데......
무뚝뚝한 갱상도 아자씨, 내 남편은 나를 영 고물로 취급하고 있단 말이다.
미장원에서 거금을 들여 염색을 하고 파마를 한 지 열흘이 지났건만
아는 척은 커녕, 눈길도 한 번 제대로 아니 주고,
남편 사로잡을 로맨틱 잠옷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선전하는 홈쇼핑에서,
큰맘먹고 사 놓은 그 '야사끼리한 잠옷'도 벌써 일주일째 옷장에서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있다.
마누라 보기를 돌같이 하는 남편 앞에선 무용지물인 것이다.
그런 남편에게 '나 좀 봐 달라'고 콧소리 내는 게 영 떨떠름하고,
자존심 상해서 '오냐, 내 자존심은 내가 지킨다'는 야무진 결심을 하고,
행동으로 옮긴 게 바로 영어회화 공부였다
'그려, 당신 잘 보라구! 난 당신 아니라도 할 게 많단 말야.
조금만 기다려봐. 그 땐 당신 후회해도 소용없단 이 말씀이야, 흥!"
그렇게 오기 반, 용기 반으로 시작한 공부가 오늘로 사흘째다.
그런데......
난 벌써 하기가 싫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내 암기력의 한계를 느낀다.
누가 감히 공부에는 나이가 없다,고 했단 말인가?
나이가 있다. 틀림없이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찰싹 붙어 다닌다.
아~~, 이 놈의 잉글리쉬는 왜 이리도 안 외워지는고?
혀는 또 언제 이렇게 굳어 버렸는고?
이 말이 그 말이고, 그 말이 이 말 같아서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있나.
영어야, 너도 객지에 와서 고생이 많다만 남의 나라에 와서 주인 행세하는 너 때문에,
이 아줌마도 머리통이 깨질려고 하는디......어쩌면 좋냐.
아~~ 괴.로.버.라!
어제 퇴근한, 엄밀히 말하자면 오늘 새벽에 퇴근한 남편은,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날 보고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리고,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시작은 잘 한 것 같은데......며칠이나 가겠노?"
'이 인간이 격려는 못해줄 망정 재부터 뿌리냐'싶어 부화가 치밀었지만,
내가 누군가, 결혼 경력 10년의 베테랑 주부 아닌가?
맘과 얼굴과 말이 삼위일체가 아니라 삼위백체도 가능하단 말씀이다.
"응. 당신은 일하고 공부하느라 새벽에 귀가하는데, 나 혼자 편하게
잠자는 게 미안해서 시작한거야. 내 공부도 하고 당신도 기다리고......
이게 바로 일석이조 아니겠어?"
"하하하, 그래~~ 그럼, 열씸히 해 보라구!"
'오잉? 지금 저 말이 격려냐, 배배 꼬는 것이냐......'
에구구. 그나저나 어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벌써 지겹다니......끙!!
남편은 연구원이다.
그런데 세상연구는 혼자 다 하는지 매일 새벽 1~2시가 되어야 귀가를 한다.
가끔, '오늘은 피곤해서 일찍 퇴근한다' 하는데 그 일찍이라는 것이 밤 12시다.
그런 사람이 마흔이 넘어 박사공부를 한다고 학교까지 다니니 ......
남편도 죽을 맛인가 보다.
삼십대만 해도 청년 같았던 남편은 이젠 누가 보아도 유부남, 확실한 아저씨다.
게다가 요즘은 공부한답시고 머리를 싸매어서인지 흰 머리카락마저 제법이다.
크크크.
남편의 흰머리는 아주 고소하고 통쾌하다.
남편이 고물취급 하는 난, 그래도 아직 흰 머리카락은 없으니까 말이다.
'아~~~함'
하품이 그칠 줄도 모르고 연신 쏟아져 나온다.
아직 세 장도 못 넘겼는데 꿈나라에선 날더러 어서오라 하니......
'수면제가 따로 없구나.
그래, 자정이 넘었으니 오늘은 이만하고 자자.'
어질러진 책상 위를 주섬주섬 정리하는데 '띠리리 띠리리' 전화벨이 울린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전화하는 사람.
확인할 것도 없이 남편이다.
"여보세요"
"내다"
"왜요?"
"아그들은 자나?"
"그럼요.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당신은 안자나?"
"이제 잘려구요"
"그래? 그럼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라"
오잉? 이게 뭔 소리랴???
"왜 요~~옹?"
"응, 별 건 아니고, 당신이 써비스해 줄 게 있는데....."
"써비스? 뭔 써비스?"
"하하하. 꼭 말로 해야 되나? 하여튼 내 지금 집에 가니까 기다리라"
딸깍.
남편은 전화를 끊었지만 난 한동안 수화기를 놓지 못하고 있다.
써비스?
오늘이 뭔 날이래?
그래, 뭔 날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
이 한 몸 불태워 남편의 사랑을 끌어 낼 수만 있다면......크크
남편의 '갈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에 괜히 히죽 웃음이 나온다.
누구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려, 마음껏 웃어나보자.
푸하하~
아니지, 이렇게 웃고만 있을 일이 아니지.
후훗. 샤워부터 해야쥐~~~.
그리고,
남편이 출장 갔다오며 선물해 준 향수도 칙칙 뿌리고,
그 '야사끼리한 잠옷'도 첫 선을 보이는게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끝낸 후 거실로 나와서,
오디오에 '환상의 무드음악'이란 제목의 CD를 넣고 재생을 버튼을 눌렀다.
음, 음악 죽이는 군~~~~~~~~~~~~~
결혼생활 10년 동안,
남편이 오늘처럼 미리 전화로 통보하는 경우는 흔치 않아서,
나는 마냥 설레이고 있었다.
잠시 후, 남편이 현관문을 열쇠로 딸각, 열고는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고,
나역시 묘한 웃음을 흘리며 남편에게 와락 안겨본다.
'옴머, 좋은 거......'
남편, 나를 살짝 밀쳐내며,
"당신, 향수 뿌렸나?"
"응~~~~~"
"건데, 무슨 옷이 그렇노?"
"응~~~~~. 좀 야하지?"
"뭐, 괜찮긴 한데......"
"근데 왜?"
"아, 아니다~~ 당신, 영어 공부하고 있었나?"
"응~~~"
"공부는 잘 돼나?"
아니, 이 남자가 왜이리 뜸을 들이는거야,
난 진즉에 목욕재개하고 준비 끝냈는디......
"자기야~~, 아까 자기가 써비스 해 달란 게 뭐야?"
"아, 참 깜박 잊을 뻔했네"
남편은 가방에서 부시럭거리며 무언가를 끄집어내었다.
"그게 뭐야?"
"보면 모르나?"
"이건 염.색.약. 인데?"
"오늘 점심시간 때 근처 미장원에 이발하러 갔는데 미용사가 그러더라.
내보고 염색해라꼬. 그런데 시간이 있어야지.
미용사가 집에서 해도 된다캐서 미장원에서 하나 사왔다 아이가"
"그래서? 지금 나더러 당신 머리 염색해달라고?"
"그래"
"그럼, 당신이 말한 써비스란게 이거야?"
"그래. 그럼 뭔 줄 알았냐? 빨리 시작해 봐라"
'으~~~~~~~~~~~~악' 하마터면 비명이 튀어나올 뻔 했다.
그럼, 향수뿌리고 잠옷 입은 내가 써비스해야 할 게 염색이었단 말이지,
인간이. 정이 안 간다. 정이 안 가.
아이고, 내 팔자야.
내 청춘 돌리도~~~~~~~~~~~~~~~~~ ^^*
2001. 12. 14 淸顔愛語
겨울바다 - -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었던 새들이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오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詩 김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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