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군 정신전력 교육 기본교재에 독도를 영토분쟁 진행 중이라고 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82

마포구 도화동 산..몇번지...(2)


BY mspark0513 2001-11-16

내가 다시 도화동을 찾은 것은 그곳을 떠난 지 십 년이 지난 뒤였다.

세상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정의라고 믿었던, 내 사고들의 꿈틀거림을 제어하기 어려웠던 마음을 안고, 가난해서 너무나 자유로웠던 내 유년이 묻어 있는 그곳을 가보기로 한 것이다.

 

그곳은...

십년이 흐른 그때도 많은 계단이 있었다.

내 동네 놀이터에서 보기 쉽지 않았던 아이들이

가난이 베여 있기는 해도 천진한 웃음이 층층 계단 마다에 있었다.

복자와 내가 살던 집과, 명숙이가 살던 집이 새마을 운동과 근대화 발전에서는 뒷전이 되었는지 그대로 그렇게 그곳에 주인이 바뀌어 낡고 초라하고 작게 그렇게 있었다.

 

내 유년시절 성만큼 커 보였던 마포 성당이 넓은 뜰은 작은 교회만큼의 크기였다는 것을 그때 알았고, 아름다운 동네였던 마포 아파트는 재 개발두고 낡고 초라해 있었다.

 

그랬다... 그곳은 여전히 가난했고 가슴 시린 그런 곳이었다.

복자는 진학을 하지 못했으며, 그녀의 엄마처럼 화장을 짙게 하고 밤마다 외출한다는 소식을 구멍가게에서 듣게되었다. 가난의 대물림을 감당하는 모양이었다.

깔끔하게 기억되던 명숙이는 알 수 없는 곳으로 이사했다.

동굴은 찾을 수가 없었고, 호박밭도 찾을 길이 없었다. 가로등이 훤하게 켜진 공중화장실 옆에서 해 짧아 놀이가 늘 부족하던 그 자리에서 이렇게 늦 가을이었던 그때를 기억하며 스믈두살의 나는 난 베이지색 모자 달린 바바리을 입고 한참을 서있었다.

 

복자가 보고 싶어서...

명숙이가 보고 싶어서...

아니, 더 간절했던 것은 자유가 그리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도화동이 사는 게 불편하게 느꼈을 때 그곳을 떠나 일상들의 삶 뒤편에 언제나 때묻은 옷 입고, 손등 얼어 터져 피가 나고, 하얀 달력을 뒤집어 놓고 참빗으로 빗으면 이가 꿈뜰거림을 보며 자랐지만 그래도 불행을 알지 못했던 도화동의 삶이 그리웠던 것 같다.

 

내 아버지도 술을 즐기셨지만, 그래서 가족들을 힘들게 하셨지만, 그 동네의 모든 아빠의 비슷한 일상사였기에 난 그것이 불행인지 알 수 없었던 거다.

가끔은 풀빵을 손에 사 들고 들어와 잠자는 우리를 깨워 얼굴 부비며 사랑을 표현하셨고

동요를 무용과 함께 가르쳐 주시곤 했다. 그런 아버지가 그곳을 내려오시면서 여자을 탐하셨고, 엄마를 무시하시기 시작하셨으며, 우리에게 메를 들기 시작했다.

나로 하여금 현실에서의 이탈을 꿈꾸게 하는 그런 아버지가 되어버렸다.

 

가난했던 유년시절보다 더 힘겹고 어렵게 느꼈던 내 청소년 시절의 아버지는 그렇게 내 기억 속에 결혼에 대한 부정과 가족애에 대한 불신과 엄마가 당한 부당한 대우와 엄마의 희생이 늘 우울했던 그런 아이로 자라게 하고 있었던 거다

 

친구들 속에서는 너무 밝은 나였지만, 혼자일 때 외로움과 엄마에게 함부로이신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느껴야 했던 청소년으로 자라나고 있었던 터 였다...

난 단칸방의 산동네를 그리워 했고, 난 도화동에서의 몇 번이나 걷어 입었던 분홍색 쉐타가 입고 싶었던 거다.

 

내가 교회에 나간 것은 내 얼릴 적 도화동의 교회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다.

내가 신앙을 갖게 되면서, 내 삶의 변화에 상당한 도움이었고, 커다란 사랑이었으며

오늘날 가슴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게 했다.

 

도화동을 다시 찾게 되었을 때 설명할 수 없는 내 안의 분노가 사라졌는데 어느덧 그것도 이십여 년이 지난 일이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후 그곳은 개발의 붐이 일기 시작했다.

지금은 땅값이 만만치 않은 부유함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메스컴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래도 내 머릿속의 도화동은 새끼줄에 연탄 사 들고 봉지 쌀 들고 머리 숙이고 들어서야 했던 낮은 집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