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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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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 도화동 산..몇번지...(1)


BY mspark0513 2001-11-12

기와집이 드물었던 곳... 계단을 무지 많이 올라야 내가 살든 동네가 있던 곳...

새끼줄에 연탄을 사나르고, 봉지 쌀을 사다가 먹었다. 1960년대 그때는 그랬다.

우리 집엔 두 가구가 살았는데 끝 방에 상이군인으로 한쪽 팔이 자유롭지 못한 아빠와

늘 짙게 화장을 하고 매일 나가시는 엄마를 둔 \"복자\"라는 친구가 살았고, 그녀는 매일 수제비를 끊이고, 밀가루에 이스트를 넣은 노오란 빵을 쪄서 먹었다.

그래도 늘 얼마간의 쌀을 비축하고

몇십 장의 연탄을 드려놓았던 우리 집이었기에 난 엄마 몰래 그녀의 밀가루 음식과 밥을 바꾸어 먹곤 했다. 유난히 성격이 나쁜 남동생에게 그녀는 빗자루로 자주마저 나의 가슴을 졸이게 하곤 했다.

 

우리 집 아래 많은 계단을 올라 파란 대문 집에 살던 \"명숙이\"늘 길게 머리 땋고 예쁘던 그녀의 집은 기와집이었고 장롱 속에 테레비전을 보관하고 있어 우리의 부러움을 사곤 했다. 명숙이는 유난히 손을 떨고 치아가 없고 허리가 굽은 할머니랑 함께 살았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수도에 늘 많은 물통이 줄지어 있었고

가물 때 는 물을 아랫동네에서 길러다 먹어야 했다.

빨래는 양재물 로 빨아 양잿물을 사오는 심부름을 내가 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공중화장실을 사용했으며, 공중화장실 옆에는 커다란 나무에 커다란 등이 있어

늦게까지 뛰어놀곤 했는데, 늦게까지 어른들이 아이들을 찾았던 기억이 없다.

가난해서 자유로웠던 우리들...

,

늦은 시간이면 어른들이 모여드는 집들, 어디선가 늘 싸움소리가 잦았고

늦은 밤까지 술 취한 아버지들의 노랫소리가 이어지곤 했다.

우리 집 윗계단 으로 한참을 오르면 커다란 마포 성당이 있었고, 우리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동굴이 있었으며, 아래쪽 한참 내려가면 아름다운(?)동네 마포 아파트가 있었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육 백원 선생님)의 훈시가 늘 길게 느껴졌던 마포국민학교...

한강에서 수영하고 설매타고, 뚝방에서 나물 캐고, 윤정희와 남정님과 최무룡과 남궁원 님들의 커다란 사진간판이 자주 바뀌었던 극장들...

 

그랬다..

내 유년시절은 그렇게 가난했고, 그러나 자유로웠으며 해가 짧다 느끼며 즐거운 놀이에 빠지곤 했다.

 

빈부의 차이을 느낀 것은 고학년이 되면서 마포의 아파트의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하면서

였던것 같다...

 

\"어디사니?\"

\"도화동이요..\"

 

그리곤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던기억... 당시 선생님들의 편애를 느끼기도 하면서

달동네가 인식되기 시작할 때쯤 다행이도(?) 우린 화장실이 실내에 있는, 마당이 있고 냇가가 있고 가까이에 산이 있는 시골 마을 아버지의 근무지 이전으로 인한 관사에 살 수 있게 되어 그곳을 내려오는 영광(?)을 가졌다.

학교 운동회 때 본부석에 초대되는 아버지를 둔 가난했던 내가 아닌 새로운 시골학교의 학생이 된 것은 오 학년 이맘때 쯤이었다.

그때가 삼십여 년 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