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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주부의 알.콩.달.콩/12.천원짜리 수박


BY 꼬마주부 2000-07-19

12.
천원짜리 수박

저희 신혼집은 시장이 끝나는 골목에 자리잡고 있어요.
시장 곁에 살아서 별 지저분한 것을 다 보고 살겠구나, 하시겠지만 저희 집은 다행히도 과일 가게만 즐비한 기다란 골목길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답니다.
자전거 한 대 정도만 여유롭게 지날 수 있는 좁다란 골목길에 서로 마주하고 있는 과일 가게 들은 골목이 시작하는 도로변 버스 정거장까지 빼곡하답니다.
덕분에 저는 첫 신혼살림을 향기로운 귤냄새로 시작할 수 있었고 진열 된 과일들의 색색으로 계절을 미리 느낄 수가 있답
니다. 요즘은 복숭아가 한참 물 오르듯 나와 그 좁다란 골목길이 온통 복숭아 향기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과일은 철에 따라 값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 아시지요?
여기 과일 골목도 그렇긴한데 철 뿐 아니라 가게마다 조금씩 다르기도 해요.
젊은 아가씨 비슷한 아줌마가 파는 곳은 조금 더 비싸고, 많이 늙으셔서 허리도 제대로 못 펴시는 할머니 쯤 되는 아줌마들
께서 파시는 곳은 조금 싸고 그래요. 저는 좀 비싸도 젊은 아줌마가 더 싹싹하고 진열도 잘 해 놓으니 거기서 많이 사먹는
편이죠.

지금도 팔긴 하지만, 한참 수박이 물 오르듯 날올 때, 저희는 수박을 한 개도 사먹지 못했어요.
올해 수박은 다들 어찌나 그렇게들 큰지, 저같은 꼬마 주부는 혼자서 들지도 못할 수박들이 넘치더군요.
또, 식구라곤 둘 뿐이라 항상 참외 두 개 천원어치, 오렌지 세 개 이천원어치, 딸기 천 오백원어치..이렇게 사 먹다가 6천원, 8천원 때론 만원하는 수박은 "힉!" 소리만 날 뿐 도저히 돈주고 사 먹을 순 없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친정집에 가서 뺏어오다시피 한 거나, 누가 사 들고 온 것을 냠냠 짭짭 먹었지요. 하나를 가지고 한 일주일은 먹나봐요.
그러다 보니 이 여름에 수박 먹어 본 것은 손 꼽을 정도, 여름이면 수박이 입맛에 땡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니겠어요?

먹고 싶어서 며칠 전부터 그 길고 좁다란 골목을 지나다니며 가격 동향을 살피기 시작했죠.
마침 복숭아가 나오는 때라서 수박 값이 조금씩 떨어지데요? 6천원, 5천원, 4천원.... 이 정도면 됐어! 오늘 아침, 외출하
며 본 4천원까지 떨어진 수박값에 흡족해 하며 골목을 빠져 나갔는데, "헉!" 버스 정거장 앞에 아무렇게나 수북히 쌓여 있는 수박 더미에 꽂혀 있는 가격팻말

"이천원"

이게 웬일입니까, 이천원짜리 수박이라니...꼭 사 먹어야지. 다짐을 하고 오후에 집에 오는 길에 그 가게로 갔죠. 전 누가
먼저 사갈새라 몹시 서두르며
"아줌마, 저 이천원짜리 수박 주세요."하며 수박더미 가까이로 갔는데, 세상에, 그 뒤엔 글쎄, 뭐가 있었는지 아세요?
바로,

"천원 수박"

이 있는거예요.
"헉? 이거 정말 천원이예요? 혹시...아줌마 속 좀 보여주세요."
그러자 많이 늙으셔서 바싹 야위시고 허리도 제대로 못 피시는 주인 할머니께서 친절한 웃음으로
"가르지 않아도 빨갛게 잘 익은거예요."하며 칼로 세모낳게 잘라 주셨어요.
새빨간게 어찌나 예쁘던지 감탄이 절로 나왔죠.
와하, 드디어 수박도 내 형편에 따른 수박이 나왔구나, 하며 감격했죠.

하지만, 사실 제가 감탄한 것은 천원 수박보다 겨우 천원짜리 수박을 파시면서도 너무나 고마워 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이었
어요. 천원짜리 사면서 만원지폐 내기가 죄송해서 다른 과일도 사려 했더니
"아이, 괜찮아요. 바꿔 줄 천원 많으니까 다른 거 안 사도 되요."그러시는거예요.
도리어 제가 얼마나 고맙고 할머니 모습이 예뻐 보이시던지...

저 부럽죠? 천원짜리 수박도 사먹고. 그리고 전 이제부터 젊고 싹싹한 아가씨 같은 아줌마네서 안 사 먹고 그 할머니 댁
에서만 사 먹을 거예요. 정말이예요!

ps.혹시 복숭아만한 수박 아니냐구요? 아니예요. 이만~~해요. 이따 밤에 신랑이랑 먹어 보고 맛은 어떤지도 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