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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지지 않는 것들


BY 칵테일 2001-01-29


어릴 때부터 보리밥을 싫어했습니다.
돼지고기는 아예 질색을 했고, 두부를 먹어야할 때는
안먹겠다고 떼를 쓰며 울기도 했더랬습니다.

그런 나를 아버지께선 당신 무릎에 앉히시고, 천천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께서도 돼지고기와 보리밥은 좋아하지
않으시는 까닭에, 억지로 먹으라는 것보다는 그저 당신
또한 안좋아하신다며, 그렇지만 그런 건 안닮아도 된다는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우리 때는 보리혼식을 장려하는 희한한 문화가 있었지요.

그래서 도시락을 쌀 때 보리가 얼마나 들어갔나를 선생님
께서 검사를 하는 그런 황당한 일도 벌어졌답니다.

어느 때는 쌀밥 위에 살짝 보리만을 펴서 눈가림용으로
검사를 받은 일도 있는데, 어느 날부턴가는 아예 홀딱
도시락을 뚜껑에 뒤집어 검사하는 바람에, 그 수법(?)도
결국 오래가지 못했지요.

그러니 도시락 검사가 있어 보리밥을 억지로 싸간 날은
여지없이 밥을 그대로 남겨왔던 나였습니다.

왜 그렇게도 보리밥먹기가 힘들었던지요.

그래도 다행히 집에서는 아버지께서 보리밥을 안드시는
까닭에, 일절 쌀밥 외엔 짓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해병대에서 군대생활을 하셨던 내 아버지.

제주도에서 모진 군대생활 하실 때, 물자 보급이 되지
않아 몇날 몇일을 보리밥과 콩나물로 연명하신적이 있는
지라, 육지로 나온 이후엔 그 음식들이 꼴도 보기싫어
아예 안드신다는 말씀.

그렇지만 두부와 호박에 대해서는 꼭 먹어야한다고 몇번
이고 다짐하며 내게 말씀하시던 아버지.

며칠 전, 일행들과 함께 양평가는 쪽에 있는 한적한
한식점을 간 적 있었습니다.

조용한 오후에 시골 장 냄새 소르르 느껴지는 옛 시골집을
찾아 자리하고 앉으니 기분이 묘하더군요.

방바닥은 방석 온기로 더욱 따끈하게 느껴져오고, 한지
발라 얌전하게 단장한 문들은 새삼 내가 어디에 와 있을까
싶은 설레임을 주었습니다.

보리밥정식.
각종 나물이 하나씩 상위에 놓여지고, 재래된장의 구수한
냄새밴 된장찌개, 시뻘건 국물로 뜨거운 김을 흩어내는
순두부찌개.

밥을 비벼먹으라 내놓은 냉면사발같은 커다란 그릇.

그걸 다른 사람 먹는 거 힐끔거리며 따라 비볐습니다.

쌀한톨 안 섞인 꽁보리밥.
그 밥 한술 입에 넘기며 창밖을 보니 아버지 무릎에 앉아
음식투정하며, 눈물 훔치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릅디다.

나는 별미로 이 밥을 먹었지만,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전쟁통에 눈물로 이 밥을 지겹도록 드셨을 내 아버지.

마치 입안에 돌이 들어가서 돌아다니는 것 같아...하시던
아버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황해도 배천에서 태어나 전형적인 농부의 아들이셨던
아버지셨지만, 돌아가시는 날까지 보리밥은 한번도 달게
드셔보지 못했던 분입니다.

그런 분이 고립된 군대생활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그 밥
으로 연명하며 사시던 세월이 있으셨으니.....

그 밥 다 먹고난 뒤 내 아버지 생각에 남편에게도 한번
물어봤습니다.

"보리밥 어땠어?"

"그저 그랬어."

짧고 떨떠름한 남편의 대답.
만약 내 남편이 그 밥을 좋아해서 맛있었다고 했다면
나는 아마도 남편이 조금 낯설어보였을 지도 모르겠어요.

한해 두해..... 남편과 함께 살아가며 정이 늘어가는
세월을 살다보니, 알게 모르게 남편에게서 아버지를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는 어쩌면 애초부터 이 세상 모든 딸들의 마음속
애인의 모습을 닮아 있는 지 모릅니다.

구태여 익숙해지지 않은 것에 마음 두고 애를 쓰며 익숙해
지려하는 것도 부자연스럽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켠에서는 익숙함으로 더욱 원하게 되는
그 무엇이 자꾸만 생겨납니다.

보리밥 한 술에도 아직은 내 아버지가 떠오르는 데,
더 더욱 세월 흘러가 누군가 홀로 남는 세월이 있게되면
그땐...... 무엇을 그리워하게 될까요.

앞으로 그리워하게 될 것 또한 지금 이렇게 내 곁에
오롯이 다 존재하는 데.......

그저 그 앞으로의 그리움을 앞세워 내게 익숙한 것들에,
더욱 깊은 정 나눠주며 앞으로의 삶을 살고플 따름입니다.


칵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