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족이 아파트 생활을 한지도 어언 십여 년이 훨씬 넘었다.
그러나 아직도 "아파트" 라는 주거 공간은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선 모든 것이 기능성 위주로 편리하다.
공동주택의 장점답게 모든 문명 혜택의 중심에 있다.
거의 모든 생활을 전화나 인터넷으로 해결 할 수 있다.
그만큼 첨단 설비가 먼저 발붙이는 곳이기도 하다.
주변의 교통여건이나 상권 또한 여느 단독주택보다 대체로 월등하다.
주차장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편의시설이다.
이 모두가 기정사실이라 해도 난 "평화롭다"는 형용사는 쓰지 않는다.
난 여태껏 한번도 그런 느낌은 못 받았으니까.......
"아파트" 라는 새로운 주거개념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활패턴을 요구했다.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의식주 생활을 자연스럽게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우리의 가치관 또한 급속히 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공동생활" 이라는 만만치 않은 숙제가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없이 한 지붕 밑에서 포개어 살고 같은 대문을 드나들며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
친족중심의 유대감에 익숙한 채 낮 가림이 심해 조금은 배타적이기도 했던 우리네 정서에는 적응하기가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또한 집이 주거의 개념을 넘어 富의 척도로 변질되기도 한다.
아파트의 평수나 위치에 따라 보이지 않는 경계가 생기기도 했다, *학군......하면서.
한편으로는 집의 크기나 치장 혹은 자동차 등 새로운 경쟁을 부추기기도 한다.
따라서 상대적 빈곤을 쉽게 실감하기도 한다.
우리들의 소비문화 역시 쉽게 영향을 받는다,
모든 백화점 셔틀버스의 표적이 되어 나도 모르게 과소비에 쉽게 길들여지기도 한다.
이웃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서로를 배려하는데 인색치 않던 우리네 미풍양속이 이 동네에선 찾기 어렵다.
어디선가 밤 열두 시가 다 되었는데도 피아노를 쳐 댄다.
아마도 음대 실기시험을 준비하는가 보다, 이해는 하면서도 거슬린다.
새벽 여섯 시 반, 윗집에서 드르륵거리며 청소기를 끈다.
처음에는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줄 알았다.
윗집 아줌마는 밤낮을 안 가리고 청소를 한다, 참 부지런하다.
휴일이면 빼놓지 않고 아이들이 굿을 한다, 손자들이 오나보다.
그 애들은 새벽 두 시에도 공을 던지고 씨름을 하며 밤도 샐 수 있다.
그래도 거르지 않고 어른들을 뵈러온다는 것이 요즘 어디 쉬운 일인가? 기특해서 참는다.
맛있는 김장을 한다며 반나절을 절구에다 마늘도 찧는다, 믹서로 갈면 맛이 없대나.......?
앞집 문 앞엔 항상 쓰레기봉투가 줄지어 있다, 여름에는 냄새도 나고 파리도 들끓는다,
그녀가 스칠 때 풍기는 진한 향수 냄새와 무척이나 대조적이다.
친해 보려고 앞집에 보낸 김치 빈대떡이 그 집 문 앞에 있는 쓰레기통에 대나무 받침 째 버려져 있는걸 발견했다.
내가 너무 촌스러운 짓을 했나? 다시는 그 집 문 앞에 얼씬거리지 않는다.
개나리 울타리 너머로 열무김치를 나누어 먹던 우리네 인심이 언제 이렇게 되었는고?
옛날의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요즘은 무색하다.
이제는 "인정"을 내세우던 풍습에서 함께 사는 매너를 익혀야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무조건 참기만 하면서 미워하고 불평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들과 함께 살아 가야할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내가 먼저 가슴을 열기로 했다.
"우리 집에 차 마시러 오시겠어요?" 아이들이 한참 신나게 뛰노는 윗집에 인터폰을 했다.
"무슨 날이세요? 지금 손님이 많아서 곤란한데......" 윗층 여자가 난처해한다.
"손님이 오셨군요, 어쩐지 소란스럽다 했지요, 원두커피 향이 아주 좋은데......"
나는 못내 아쉬운 척 한마디했다.
"어머, 시끄러웠어요? 몰랐어요!" 윗집에서 미안해한다, 성공이다!!!
"지금 우리 집 오시면 잘 들리는데....."난 다음을 약속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이제 그 집은 가끔 소란스럽다, 그 정도는 나도 봐 줄만하다.
지하 주차장에서 앞집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일부러 못 본 척 했다.
"하이!"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손을 들어 큰소리로 장난스레 인사했다,
"해브어 나이스 데이!" 그녀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요즈음 내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너무 의례적이라 멋 적기도 하지만 우선 관심부터 표시해 보려는 의도이다.
다음 얘기는 다음에 하자, 한 걸음 한 걸음씩........보조를 맞추어 보자.
우리들의 보금자리인 아파트에도 온전한 의미의 "평화"가 깃 들기를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