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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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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산 500원


BY orhkido 2001-01-02

전재산 500원

쌀쌀한 바람이 가슴을 시리게 할 무렵이면 구세군 남비가 나타나고
불우이웃을 돕자는 방송들이 쏟아진다.

나 역시 나누고 사는 삶이 가장 값진 삶이라 여긴다.
하지만 난 아직 여유가 없어, 내가 남 도울 형편이 아니야,
좀더 잘 살게 되면...여러 이유로 날 합리화하면서
고개 박고 외면하는 달 12월.

난 아직도 국민학교(난 국민학교를 다녔다)5학년때의 일이 잊지못한다.
그 때만큼 순수하고 깨끗하게 남을 도와본적이 없다.

그 때도 이맘때쯤 하교하는 길에 친구들이랑 다 헤어지고 나만 남아 집이 코 앞이었다. 근데 불쑥 백발의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내게 손을 내미셨다.
"아그야, 차비가 없어 집에도 못간다. 차비 좀 주라"
난 그 순간 아주 잠시지만 고민했다. 100원짜리가 있었으면 좋을걸. 며칠을 문방구에서 봐둔 수첩 사려고 모은 돈이 500원.
딱 500원 밖에 없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500원으로 많은 일을 난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인 그때로는...
바꿔 줄 수도,없다고 말할 잔머리도 없고 잠깐의 고민 끝에 내 전재산
며칠을 과자 안먹고 모은 500원을 선뜻 줘버렷다.
약간의 고민과 섭섭함이 스쳤지만 그 뒤엔 뿌듯했다.
할아버지의 환해지는 얼굴을 확인하고는...

근데 그 할아버지는 버스 정류소로 가지 않으셨다.
전 재산을 털은 터라 잘 타고 가시나 몰래 쫓았던 것이다.
잘못 가시면 갈쳐드릴려구.
그 할아버지는 선술집에서 소주를 사시고 안주없는 술을 드시고 계셨다. 내 전재산으로.
그 때는 참으로 분한 마음에 울면서 집으로 왔다.
엄마에게 그 얘기를 하고 내 아끼던 전재산이 나쁘게만 여기던 술먹는 일에 쓰인 것이 너무나 허무해서 내내 울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나도 애 엄마가 되고 늙어 가면서 난 그 때처럼
장한 일을 해 본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단한 할아버지의 한 잔 술을 내 전 재산으로 사 드릴 수 있었다는 생각이 오히려 버스비 보다 더 잘되었다 싶어졌다.
어느 순간 내가 나이들면서 그 어릴 때 기억이 따뜻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누가 내게 아무리 곤궁한 얼굴로 뭐를 요구해도 지금의 난 전 재산을 내놓지는 절대 못하겠지. 전재산 아니라 일부라도 며칠은 계산하고 고민하고 뒤척이고 자로 재겠지.

나도 언젠가는 그 어린 시절의 순수함으로 나눌 수있기를 기원한다.
단 100원, 1000원이라도 나눔에는 그런 순수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큰 돈이라도 무슨 의미나 사랑이 있을까?

세밑이 되면 구세군 냄비의 붉은 색이 눈에 확 들어오는 거리를 걸으면 그 어린 시절 전 재산을 아낌없이 주었던 내 순수가 그리워진다.

1000원짜리 한장 겨우 넣는 내 손이 부끄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