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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이야기 7- 떠난자와 남은자>


BY 금빛 누리 2001-06-16

흙먼지 뽀얗게 이는 신작로가 가겠집에서 깡 소주 한병을 비우고 그는 휘적휘적
마을 뒷산 길을 올랐다.빈속에 들어간 알콜이 그를 단숨에 취하게했다.
" 넨장맞을....."
그렇다. 정말 넨장맞을 봄 햇살이다. 적어도 그에겐.
언덕길 여기저기엔 노오란 개나리가 만개해 그의 눈을 부시게했다.
술기운 탓인지 숨이 가빴다. 그는 잠시 멈추어 서서 숨을 고르며 언덕 아래 저멀리 은빛 비늘 같은
물무늬를 반짝이며 길게 흘러가는 강과 아직은 흙빛인 들판과
언덕 아래 옹기종기 들어선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봄 한낮의 축복같은 햇살은 세상에 저리도 넉넉하게 뿌려지고 있는데 그의 마음은
춥고 횡량한 겨울 벌판처럼 막막하고 참담한 바람 소리만 아우성쳤다.
저만치 잡목이 우거진 숲사이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양지 바른곳 무덤가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그가 비척거리는 잘자국 소리를 내며 닥아가는것도 모른채
남자는 무덤을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다.비석 앞에 놓여있는 노란 장미 꽃다발.
그가 일부러 크게 기침 소리를내자 그 때서야 무덤 앞의 남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는 더 이상 언덕을 올라갈 마음이 없었으므로 철푸덕 소리를내며
무덤 가까운 풀밭에 주저 앉았다. 들고온 비닐 봉지에서 소주 병과 새우깡을 꺼냈다.
종이컵에 술 한 잔을 따라 마시려다 문득 남자를 보았다.
" 형씨, 한 잔 하시려우?'
" 아니,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남자는 미소띈 얼굴로 말하고는 다시 무덤으로 시선을 돌렸다.
(넨장맞을.... 시방 도데체 뭐하는거야? 설마 실성한 작자는 아닐테구...)
그는 술 한 잔을 단숨에 비우고 다시 또 빈 종이컵을 채웠다.
" 어이! 형씨, 딱 한잔만 드슈.이런데서 낮술 마시는 기분두 과히 나쁘진 않수다."
그제야 남자는 그의 곁으로 옮겨와 앉았다.그가 건네는 술 한잔을 받아 마신 남자는
그에게 술잔을 건네며 물었다.
" 혹시 저 아래 마을에 사십니까?
" 그렇수.이 지긋지긋한 촌 구석이 싫어서 도시루 떠났다가 얼마전 낙향했수.형씨는 어데서 오셨수?"
" 예, 전 서울 삽니다.한달에 한번 이곳에 다녀가지요."
" 저 무덤은 누구 무덤이요?"
" 13년전에 먼저 간 제 아내의 무덤입니다."
" 그려? 왜 죽었수?"
" 병으로 사망했습니다.바로 저 아래 동네에서 태어나 자랐다던데 혹 아실런지요?"
" 이름이 뭐요? 죽은 부인 이름말이요?."
" 최정미입니다.열한살 때까지 여기서 살았다했습니다."
" 최정미라....." 그는 오랜 세월을 거슬러 기억의 저편을 더듬듯 눈을 가늘게 뜨고
푸른물 베어날듯 청명한 하늘을 잠시 올려다 보았다.
그의 기억속에 가물거리며 유난히 얼굴이 하얗고 갸날팠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
봄 들판의 아지랭이처럼 피어 올랐다.
" 어렴풋이 기억나오"과수댁 딸아이였수.내 그때 읍내 중학교 댕겼는데
딸하나 델구살았던 과수댁이 이장댁 뜨네기 일꾼과 눈이맞아 야밤 도주하고
그 어린 아이는 도시 고아원에 갔수다.그애 이름이 정미였는데...."
" 맞습니다.아내는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했지요. 한번도 나에게 고향 이야길
한적이 없는데 죽기전 이곳 이야길 하더군요. 언제나 마음속으로 그리워했다구요.
자신이 죽으면 고향 마을이 잘 내려다 보이는 이 언덕위에 묻어 달라고 했습니다."
" 부인...정미가 죽은지 십몇년이나 되었다면서 선생은 그럼 재혼했수?"
남자는 싱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아직 한창인 나이에 혼자 지낸단 이 말씀이요? 아이는없수?"
" 남매가 있는데 어머님이 키워 주셨습니다.저기 아내 무덤 뒤쪽에 나란히 서 있는
전나무 세그루 있지요?'아내를 땅속에 묻고 제가 묘목을 심은것인데요
바로 우리 가족이지요. 그러니까 아내는 결코 혼자 있는것이 아니구
우리 가족도 아내와 떨어져 있는것이 아닙니다. 우린 지난 13년간 늘 함께였지요.
저는 오늘...아내에게 허락을 받으러 왔습니다."
" 무슨 허락? 아니, 죽은 사람한테 뭔 허락을 받는다구 하슈?"
마침 적당한 사람이 있어서 재혼을 하려구요.
아내는 눈 감기전 저에게 당부했지요.자기는 잊어버리고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라구요.허지만 전 아내의 무덤가에 저 나무를 심으며 다짐했었죠.
결코 재혼하지 않으리라구요.그랬었는데......"
남자는 잠시 말을 끊었다.
" 산다는게 그런것 아니겠수?"
남자는 고개를 두어번 끄덕거렸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생각했다.
농촌 생활이 넌더리난다구 전답 싸그리 팔아치워 도시로 떠났다가 결국 3년만에
빈 털터리가 되어 되돌아온 고향.그래도 불평 한마디없이 묵묵히 참아내는 아내.
그 아내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었일까?
세상을 탓하고 자신을 탓하며 이 좋은 봄날에 낮술이나 퍼마시고 있다니........
저 이름도 모르는 남자는 죽은 아내를 위해 13년간 아내의 무덤을 찾아와
저리도 푸르게 나무를 키워냈는데..............
그는 갑자기 술이 번쩍 깨는듯했다. 아내는 지금 어느 밭고랑을 힘겹게 메고 있을 것이다.
그는 마치 잊어버렸던것을 되찾기라도 한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래, 형씨.이제그만 재혼하슈.죽은 정미도 기뻐할거요. 내 기억에 그 아이는 참 착한 아이였소.
형씨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더라면 좋았을것을......
난 이만 내려 갈라우. 형씨는 더 계실려우?"
" 네, 먼저 내려가십시요. 전 좀더 있다 갈겁니다.
아내에게 아직 할 얘기가 많습니다.
봄 햇살 가득한 언덕배기 비탈길을 내려오다 그는 문득 뒤를 돌아 보았다.
비석 앞에 놓여진 노란 장미꽃 다발이 찬란한 슬픔으로 고여있는 무덤 앞에
한 남자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그는 왠지 눈시울이 붉어져 "이런, 넨장맞을눔의 햇살..."
턱없이 봄햇살을 탓하며 비척이며 언덕길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