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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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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 남편 동행기


BY my꽃뜨락 2001-05-18



참, 나도 한심하다. 우째 남편 빼면 얘기가 안되는지
끄적이는 글마다 남편이야기로 도배를 한다. 내가 보
기에도 남편을 되게 좋아하는 것같은데 이게 혹시 짝
사랑 아닌가 몰러...

내가 남편과 십수년 같이 살며 제일 애를 먹은 것이
남편의 음주습관 때문에 숱하게 빚어진 사건, 사고이
다 보니 술의 ㅅ자만 나와도 벌써 눈꼬리가 홱 째진다.

마누라가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술만 보면 너무 행복
해서 입이 귓가에 걸리니 이 일을 무슨 수로 말리겠는가?
우리 부부는 서지학자인 남편 선배께서 강의하시는 불
교역사 강의에 몇년째 참여를 하고 있다.

그 날도 강의 후 늦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일행과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려는데 저녁반주로 날아갈 듯 기
분이 좋아진 남편이 선배님 집에서 술 한잔 더 하고 가
겠다고 부득부득 우기는 것이었다.

술을 체질적으로 즐기지 못하는 선배님이지만 후배가
술 한 잔 하겠다는데 그만 가라고 등 떠밀 수 있나?
그러자 하고 술상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그 날의 주종은 러시아산 보드카로 몇 잔만 마셔도 헤
롱헤롱 맛이 가는 순 독주였다.

나이 탓인지 주량이 예전의 반만 마셔도 주벽의 효과
를 100% 달성하는지라 옆에 앉은 나는 조마조마한 심
정으로 제발 그만 마시라고 딴지를 걸었지만 남편은
요지부동으로 선배님 한잔 마실 때 서너잔을 들이키는
속도전을 감행했다.

그 독한 보드카 한 병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비워버
린 남편이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선배님과 작별한
시간은 자정이 지난 새벽 한시가 가까워서였다. 마침
집까지 가는 심야좌석버스가 있었던지라 우리는 부리
나케 버스에 올라타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평소에는 너무 말수가 없어 옆에 사람을 거북하게 하
다가 술만 들어가면 목소리가 커지고 입이 튀어나오면
서 쉴새 없이 떠들며 좌중을 휘어잡는 남편의 주벽을
아는지라 버스에 앉자마자 나는 남편은 재우려고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기고 있었다.

그러나 주량이 약간 부족했던지 남편은 눈이 말똥말똥
통 졸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예의 그
큰 목소리로 무엇이 어쩌니 저쩌니 떠들기 시작했다.
차 끊어질 시간이 임박한 때라 그야말로 버스안은 입추
의 여지가 없이 승객으로 꽉 찼다.

나는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쉴새없이 쏟아내는 남편 입
속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와 버스 안 사람들에게 공개적
인 망신을 살까 모골이 송연해 불발탄이라도 앞에 있는
듯, 안절부절 제 정신이 아니었다.

마누라가 그러거나 말거나 기분 내키는 대로 실컷 떠들
던 남편이 집에 다 왔다며 내리자는 나에게 어, 벌써
다 왔어? 그럼 빨리 내려야지 하며 벌떡 일어나 먼저 앞
으로 나갔다.

통로에는 미리 일어나 내릴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여럿
서있는지라 나는 나중에 일어서려고 자리에 미적미적 앉
아있을 때였다. 좌회전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버스가
과격하게 훽 핸들을 틀어버린 것이었다.

그 바람에 건들거리고 서있던 남편이 그만 좌석사이로 고
꾸라져 두 발이 공중으로 번쩍 들린채 물구나무 서기를 해
버린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챙피는 나중이고 웃음이
나와 참을 수가 없어졌다.

에고, 내가 옆에 없어서 다행이다. 모른 척 해야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킥킥대고 있는데 누구 하나 잡아주는
사람이 없는지라 남편은 한참을 그렇게 처박혀 버둥거렸다.
이런 싸가지 없는 인간들 같으니... 손 좀 잡아주면 어디가
덧나냐? 통로가 막혔으니 내가 뛰어나가 일으켜 세울 수도
없고... 무심한 승객들만 원망하며 남편이 중심을 잡아 일
어서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버스에 내리자마자 남편은 쑥스러운듯 씩 웃으며 내게 소근
거렸다.
여보, 내가 말이야. 버스가 홱 도는 바람에 넘어졌다니까?
당신 나 넘어진 것 못봤지?
으응~~ 못봤지. 조심하지 않고 넘어지면 어떡해? 다친 데
는 없어?
어,어? 괜찮아...

손까지 휘휘 젓는 남편의 등 뒤를 따라가며, 사는 것이
코미디가 따로 없구나싶은 생각에 한참을 허파에 바람 든
년처럼 실실 웃으며 새벽길을 걷고 있었다.


꽃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