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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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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제결합


BY 오두막편지 2001-01-06

지나간 2000년 여름 늦장마가 시작된 8월24일 밤10쯤 전화벨 소리가 시끄럽게 온 집안에 울려 펴졌다. 청주에 사시는 작은어머니의 전화였다.친정아버지께서 위독 하셔서 몇시간을 못넘기시겠다는 내용이었다. 난 아이들과 집안일을 남편에게 맏겨두고 청주로 내려가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섰다. 시간이 늦은 관계로 청주로 내려가는 시외버스는 끝나버렸고 조치원에서 택시로 청주까지 갈 생각으로 조치원 가는 입석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어둠속을 뚫고 질주하는 기차속에서 나는 문득 지난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할 무렵 아버진 나에게 어깨에 메는 빨간 책가방을 입학 선물로 사 주시고는 돈 많이 벌어 오신다면서 집을 떠나가셨다. 직물공장을 하시다 부도를 맞은 아버진 하시던 직물공장과 연관된 직물공장에서 원단 자투리를 사다가 전국으로 다니시면서 판로를 개척 하러 다니셨다고 한다.
그날 도 원주로 원단을 팔러 가셨는데 그날 이후로 아버진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될때까지 돌아오시질 않으셨다. 매일 문밖에서 2남4녀중의 세째딸인 날 유난히도 예뻐하신 아버지를 그리며 아버지가 내이름을 부르며 돌아오실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머니의 한숨은 나날이 깊어가고 집안은 날로 기울어졌다. 어머닌 자식6남매를 굶지않고 공부시키기 위해서 안해본일이 없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어느 여름 아버지가 오셨다. 난 기쁨반 증오반으로 아버질 쳐다봤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진 지금 청주에 계신 작은어머니와 딸을 하나 낳아서 살고 계셨다고한다. 아버진 내가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 우리들과 함께 지내셨다. 그러던 어느날 청주의 작은 어머니가 아버질 찾아왔다. 그 후로 아버지의 모습을 내가 사춘기를 보내고 성년이 될때까지 볼수가 없었다.
여자 혼자힘으로 자식 6남매를 키우다 보니 온갖 고생에 화병까지 어머니의 건강이 날로 안좋아졌다. 내가 22살 여름부터 어머닌 시름시름 앓다가 급성 간암으로 내손에서 6개월간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58세의 한 많은 생을 마감하셨다. 그때도 아버진 오시질 않으셨다.
자식들에게 한과 증오를 품게 만든 그 아버지가 생명이 위독하시단다...... 핏줄이 뭔지 난 결혼을 하고나서 남편보기가 민망해서 일년에 세번씩 꼭꼭 청주에 드나 들었다. 그러다 보니 차츰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도 엉킨 실타래 풀듯이 술술 풀려나갔다......
청주 모대학 병원 중환자실에 도착하니 아버지께선 의식이 없으셨다.대구에 사는 오빠와 동생이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아서인지 아버진 긴 숨을 몰아쉬면서 삶에 끝자락을 놓지 않으시려고 무던 애를 쓰셨다. 새벽녁 자식들이 다 도착했다. 큰오빤 대구로 모셔갈 준비를 서둘렀다. 구급차에 작은 어머니와 이복 동생이 작은 오빠와 함께 타고 나머지 식구들은 큰오빠 차를타고 대구로 향했다.
25일 오후 4시5분 아버진 대구 보훈병원에서 도착 하시자 마자 숨을 거두셨다. 식구들의 오열하는 통곡소리를 뒤로하고 그렇게 아버진 아버지가 태어난 고향땅으로 돌아오셔서 우리들 곁을 떠나셨다.
비가 억수같이 ?K아졌다. 장례를 치루는데 비는 정말 웬수같았다. 4일장을 치르기로 집안어른들께서 의논을 하셨다. 웬수같은 비는 3일 내내 ?K아지더니 발안일 날 거짖말 처럼 비가 그쳤다. 살아생전 아버지 노릇을 못한 죄를 마지막 가시는길에 남은 자식들에게 씻고 가시고 싶은 아버지의 마지막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산에 입관을 하기위해 산길을 올라가는데도 구름이 햇빛을 가려주어 장례행렬을 잘 인도 해주었다. 날씨가 참 신기할 정도로 우리들에게 보탬을 주었다.
아버진 어머니 옆에 가묘를 해 두었던 곳에 고히 묻히셨다. 어머니 옆에 묻힌 아버질 지금의 작은 어머니는 허탈하게 바라보셧다. 이렇게 우리 어머니는 살아생전 못다하신 부부의 인연을 이제 고인이 된 몸으로 돌아오는 아버질 고인의 몸으로 맞이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주일전 어머니가 곱게 화장을 하고 내꿈에 나타나셔서 환하게 웃고계셨다. 아마도 그렇게 기다리던 남편이 돌아온다는 기쁨을 표현 하신것이라 생각된다.
입관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사촌오빠가 한마디 내 뱉는다
"우리 큰어무이 아마 큰아버지보고 이렇게 말하실끼다~ '뭐할라고 왔능교?'하고 돌아누우시다가 일주일이 지나면 '와 이제 왔능교~' 하고 말이다"
집안식구들은 오빠의 한마디에 다들 웃었다. 초상집에서 웃음이라니...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 콩가루 집안이라고 말할것이리라... 하지만 웃음이 났다 왜냐하면 우리어머니와 우리아버지의 긴 별겨가 끝이나고 재결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작은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그래도 난 웃음이 난다.난 우리어머니의 딸이기 때문에 웃음이 나온다.
"엄마! 이제 아버지 아무데도 보내지 마시고 꼭잡고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ps: 여러분 제독백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