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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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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늙어가는 방법 39


BY 녹차향기 2001-01-04

어젠 작은아이 생일이었답니다.
무슨 축하선물을 해 줄까 궁리하다가 본인이 원하는 걸 들어주기로 생각하고선 아이를 불렀지요.
"성민아! 니 생일날 뭐 했음 좋겠니?"
그러자 잠시 눈알을 또륵또륵 굴리던 작은아이는 엄마 눈치를 슬슬 보며 이렇게 말하겠지요?
"엄마, 친구 불러서 같이 놀면 안되요?"
"그래... 친구 누구?"
"음... 정식이 하고, 은성이 하고, 권일이하고...."
친구 불러 노는 게 아니라 친구들 불러서 생일파티를 하자는 속셈을 숨기고서는 그렇게 말하다니, 녀석, 머리쓰는 걸??!!

"안 되는 거 알지? 집에 할머니도 와 계시고, 그렇게 친구들 초대했음 뭐 맛있는 거라두 나눠 먹어야 하는데, 지금 좀 사정이 좋질 않잖아..."
솔직히 큰 애 생일은 작년까정 친하게 지내는 몇 명(20여명이 온 적도 있구)을 불러 과자파티라두 해 주었었지만 작은 애는 기억에 없어요...... ㅠ.ㅠ
왜 같은 행사인데 이렇게 큰 애와 작은 애의 차별이 있는건지 솔직히 내 행동이 의심스럽기만 해요. 학교가서 청소하는 일만해도 큰 애때는 선생님의 호출이 있음 열~~~나게 달려가서 열심히 청소를 하면서도 하나도 힘들거나 괴롭지 않았는데, 작은애 학교 일이라면 어떻게 좀 빠질 수 없을까하고 연구를 하거든요.

마치 원하는 대로 소원을 들어줄 것 처럼 말해놓고 아이 의견을 박살내다니, 차라리 물어보지나 말지....하고 원망하는 아이 눈빛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볼래?"
"오!!! 예!!!"
제 방에서 공부하고 있던 큰애까지 뛰어나오며 소리를 질렀어요.
큰애가 글짓기 우수상을 타면서 부상으로 받은 문화상품권이 몇장 있었거든요. 아침에 미역국을 끓였고, 점심엔 부지런히 잡채를 만들어 먹인 다음(국수나 면발 같은 걸 먹어야 오래오래 산다니깐) 부지런히
종로3가 서울 극장을 향해 나갔어요.
역시 어머님 혼자 집을 지키셔야 했답니다.
"어머님, 공동경비구역 보세요..."
"뭔 말이냐? 난 극장에만 들어가면 코 골며 자는데.... 돈 내고 자러갈 일 있냐?"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재밌게들 보고 오너라."

치킨 런을 상영하고 있는 극장엔 역시 꼬마손님들이 많았지요.
뜨뜻한 좌석에 점심 먹구 부랴부랴 달려와서인지 초반 도입부에선 몇번인가 하품을 하고 있었지만 큰애와 작은애는 키득거리느랴 정신이 없더군요.
반란을 일으킨 닭들의 연기가 눈부셨지요.(세공용 지점토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다 아시져?)
고생고생 끝에 자유를 향해 날개(비행기를 제작)를 달고 날아가는 닭들에게 박수를 쳤답니다.

공사 현장에서 마무리 일에 열중하고 있는 남편을 불러냈고, 카스테라케?揚?사갖고 돌아왔지요.
"치킨 런을 보면서 치킨 좀 먹지 그랬어?"
아빠가 우스개 소리를 하자 아이들이 깔깔 거렸지요.
"니들 치킨 먹을래?"
아마 여자애들 같았음 싫어요 했을텐데 녀석들은 치킨이란 소리에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시켜달라, 엄마가 직접 튀겨달라 난리였지요.
저녁상엔 제가 직접 튀긴 치킨이 올랐지만, 아무 생각도 없이 쪽쪽 빨아가며 아이들은 맛있게 치킨을 먹었어요.
친구들을 여럿 불러 즐겁게 해 주지 못해 못내 아쉬운 마음이 남긴 했지만 대신 가족끼리 오붓하게 둘러앉아 생일기념 윷놀이를 하였답니다.

생일을 맞은 성민이가 깎두기를 하고.
별반 재미없어 하시던 어머님께서두 연거푸 모, 윷을 치시며 얼굴이 상기되셨어요.
"어머님, 학원 안 가시고 맨날 윷놀이만...."
"아니다... "
윷이 잘 나오게 하려고 가지런히 세우시는 손모양이 얼마나 고우신지요.
윷놀이 경험이 몇 번 없으시다는 어머님의 말씀이 참 서글펐어요.
여럿이 둘러앉아 하는 이 간단한 놀이에 조차 어머님은 그것을 즐기실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잖아요.
어떻게 말을 움직여야 하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계셨거든요.
그렇게 고단하게 살아오신 어머님의 생.

어머님과 제가 한 편이었는데 결국 우리팀의 승리로 끝났지요.
촛불을 켜고 기념사진도 찍었어요.
생일 이벤트치곤 괜찮았는지 모르겠어요.
아무 선물도 없었지만,
작은 애는 괴념치 않아했구요.
성민아.
선물 못 사줘서 미안하다.
내년엔 꼬옥 선물 해 줄게..
크리스마스땐 산타할아버지도 다녀가지 않으시더니,
생일 선물조차 받질 못해 서운할텐데, 그런 말 한마디도 않는 네가
무척 대견하고 고맙다.
하지만, 형 덕분에 좋은 영화 봤지?

쌀쌀한 겨울바람이 부는 종로거리엔 그래도 오가는 사람들이 분주해서 무척 활기차 보였어요.
새해가 시작되어서인지 사람들의 발걸음도 씩씩해 보였구요.

어머님.
손주선물 못해주셔서 서운해하셨지요?
하지만 할머니랑 같이 살면서 할머니의 뜨끈뜨끈한 사랑을 듬뿍 받았으니 그 어떤 선물이랑 비교하겠어요?
이 빠진 자리에 새 이가 돋아나는 걸 쳐다보며 그렇게 흐믓하게 웃어줄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요?
나중에 나중에 이런 날이 있어서 더 고맙고 즐거웠다고 그때 웃으며 얘기해요.


그래도 젤 즐거웠던 생일이라고 쓰인 일기장을 읽으니 다행이지 뭐예요?

찬바람이 겨울을 더 빛나게 하고 있어요.
추운 날씨가 괴로움일수도 있지만, 그런 추운 날이 있어야 봄이 다가왔을 때, 추위가 사라졌을 때 기뻐할 수도 있으니깐요.
또 추워야 군밤장사, 군고구마장사, 난로장사, 겨울코트장사, 장갑장사, 목도리장사, 부츠장사, 붕어빵장사, 오뎅장사,보일러장사, 연탄장사, 기름장사들이 웃을 수 있잖아요.

낼 아침도 영하 십이도라고 하니, 모두들 건강에 신경쓰세요.
닫힌 문도 다시 보자,
수돗물 방울도 똑똑 떨어지게 해 두고요...

그럼, 모두 평안한 밤 되세여.

안녕히 주무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