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참으로 시끄럽다
험악하고 무섭고 또한 급변하는...
어디한곳 정감있는 풍경이란 찾을 수 없으며 늘, 매일 홍수처림 여기 저기서 쏟아져나오는 경악스런 사건, 사고들...
그런 시끄러움에 반해 내가 최근 본 한국 영화 "정"은 가을소슬바람이거나 가랑비같은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를 보며 신랑과 두런두런 애기를 나누다가 조금 웃다가 또 조금 눈시울을 붉히다가 안타깝고 애잔해하다가 끝내는 고개를 끄덕끄덕거리고 말았다.
가랑비가 알게모르게 서서히 옷속을 여미고 들듯, 가을소슬바람이 그 냉기를 천천히 미세하게 온몸으로 전해오듯
'아하, 사는 것 부대끼며 엮이고 ?霞泉榮?인생의 잔상이 이런 것이려니'라고 피식피식 쓴 웃음을 흘리게 하는 그런 영화였다.
10살짜리 어린 꼬마신랑에게 시집 와서 오랜세월 모진 시집살이를 겪으며 신랑에게선 부부의 정조차 느낄 수 없이 매일을 무미하게 살던 주인공 순이...
신학교를 다니던 신랑이 신여성을 데리고 집으로 오게 되고, 우연찮게 그들의 격렬하고 뜨거운 사랑의 장면을 목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그들의 격정적 몸부림에서 이제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후련함과 절실함을 경험한다.
그 밤 이후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고 보통이하나 들고 목적없이 길을 나서는데... 길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 길을 뒤덮은 들꽃과 푸름사이, 하늘과 곧게뻗은 신작로사이에서 나는 왜 자유로워지고 가뿐해지는 그녀의 삶을 예감했든지..
그 후 순이는 소박하고 정감넘치는 옹기쟁이의 눈에 들어 봇삼을 당해, 짧은 행복과 사랑을 경험한다. 그러나, 오래지않아 신랑은 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큰물을 만나 싸늘한 주검으로 그녀앞에 나타나게 된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한겨울 풀뿌리로 죽을 끓여먹고 짐승처럼 찬서리와 혹한을 피하면서 질기게 살아간다. 남편의 노름빚대신 노예처럼 팔려다니던 철이네가 그녀의 인생에 잠시 정착하고, 어느날 아들 철이를 그녀앞에 떼어놓은채 철이네는 떠나버린다.
순이는 그후 남은 여생을 철이만을 바라보고 철이만을 위해 살아간다. 비록 자신의 친아들은 아니지만 잘 성장한 철이와 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그녀사이의 시냇물같은 정을 그리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영화는 은은하고 아름답고 서정적인 자연배경의 아름다움과 순이라는 한시대의 여인네가 겪는 아프고 다양하고 격변하는 삶의 파노라마가 대조를 이루는 색다른 느낌의 수필같았다..
장면장면이 강하게 어필되거나 깨고 부수는 리얼함은 없었지만 누군가 잠든 머리맡에서 정다운 목소리로 읽어주는 한권의 책처럼 아침,눈을 뜨고 오랜 시간이 가도 쉬이 지워지지않을 여운이 강한 이야기인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