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초고를 탈고하고 두어 달가량을 빈둥거리며 지냈다. 시장 혹은 마트에 다녀오고, 하루 한 시간씩 운동을 하고, 그게 전부였다. 나머지 시간은 뒹굴뒹굴하거나 화초에 물을 주고 가서 들여다보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남는 시간이 많다보니 텃밭 생각이 간절했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그 마음은 늘 나를 떠나지 않았었다. 싱싱한 채소를 밭에서 뚝뚝 따다 먹는 기억 속의 맛이 늘 나를 유혹했다. 하지만 마음뿐이었다. 집근처의 땅들은 평당 몇 백씩 하니 마음만 간절할 뿐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내겐 그 정도의 돈의 퍼낼 주머니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오다가다 보이는 자투리땅도 눈이 가서 머물 때가 많았다. 그래도 보는 눈들이 신경 쓰여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마음은 그대로인 채 접어야 했다.
두어 달이 되어갈 즈음 난 다시 책상에 가서 앉았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공원을 보면서 연 속편을 생각했다. 저승을 무대로 엄마아버지의 만남을 그려낸 게 연이었다. 두 분이 이승으로 돌아오는 데서 끝을 냈으니 다시 두 분을 엮어드려야 하는 과제가 남겨진 셈이었다.
짬짬이 첫머리를 썼다 지웠다를 되풀이하기도 하고 그냥 창밖 공원을 내다보기도 했다. 공원을 내다보고 있다 보면 수향과 휴, 푸르밀과 마루가 도시락을 싸들고 공원 나무그늘에 와서 웃고 떠드는 모습이 현실처럼 다가왔다. 꼭 내게 두 번째 작품을 쓰라고 재촉하듯 그랬다.
푸른 숲(산골)에서 자란 해인을 민석이 있는 빌딩숲(도시)으로 보내야 했다. 이승으로 내려올 때 휴는 빌딩숲으로 수향은 푸른 숲으로 보내며 끝을 냈으니 둘을 엮으려면 누군가 한 사람을 움직이게 해야 했다. 난 수향의 현신인 해인을 빌딩숲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작품이 ‘촌닭, 빌딩숲에 둥지를 틀다.’이다.
작품 속에서 난 이승에 돌아온 엄마아버지를 다시 엮어드렸다. 비록 작품 속이었지만 왠지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끝내고 이틀 후에 우리 집에서 친구들 모임이 있었다. 난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내 작품 이야기를 했다. 친구들은 나만큼 나를 기특하게 생각지는 않는 거 같았다. 난 내가 기특하기만 했는데. 반 년 동안 1000여 페이지의 작품을 써냈다는 생각에 그저 흐뭇하기만 했는데.
그러고 보면 삶이란 제멋에 산다는 게 딱 맞는 말이다. 작품 두 편을 써 놓고 억만금을 가진 부자인양 부푼 내 마음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과 다를 게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반쪽이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시답잖게 여겨지는 것도 누군가에겐 전부일 수가 있으니 말이다. 내겐 글을 쓴다는 것이 그랬다. 그건 고이 지켜내고 싶은 내 전부였다.
난 다시 내게 선물로 뒹굴뒹굴하는 삶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사실 그건 선물이 아니었다. 뒹굴뒹굴하는 것을 못 견디는 내 성격이 선물로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어쩜 나는 뒹굴뒹굴하며 시간을 땜질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텃밭이 간절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