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침대위에 널브러져 쉬면서
"우와...너무 좋다아...나한테도 이런 날이 오다니...진작에 이렇게 살걸
너무 좋다아...그러니까 그게 이런 기분이었구나아..."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허이구 참내'
지난번 음식타박 사건 이후 우리집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집안일을 안 해봐서 힘든 걸 전혀 모르니까 나를 그렇게 대접하지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알게 해줘야지.
가사분담!
안 그러면 밥을 안 해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집안일을 거들지 않으면 나도 회사일을 안 하겠다고도 했다.
"내가 못할 줄 알지?난 한 번 한다면 하는 사람야~"
집밥에 집착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밥 안해준단건 엄포도 아니겠지만
회사일을 안 하겠다는 데서 흠칫 놀란 것같기도 하다.
아랫동서들에게 일렀더니 다들 펄쩍 뛴다.
"그러게 그동안 형님이 너무 잘못 사셨어요. 형님은 바깥일도 하는데
당연히 분담하셔야죠. 왜 그렇게 힘들게 사세요?"
"아주버님은 무슨 간이 그렇게 크시대요? 배밖에 나오셨네 아주. 요즘 그렇게
사는 집이 어딨어요?"
시동생들은 가사분담을 워낙 잘 하기 때문에 내남편의 역성을 들어줄 사람은 없다.
그래서 드디어 나에게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달콤한 휴식이 찾아왔다.ㅎ
추석전날 남편 혼자 산에 가길래 나혼자 장보러 가는 걸 큰소리 탕탕 치면서 다녀왔다.
원래는 제사고 명절이고 장보기부터 음식장만과 뒷정리까지 나혼자 다 했었는데...
몇 년 전부터 차례를 안 지내고 추도예배를 드리고 나서
모두 둘러앉아 식사만 하고 헤어지니까 이제 크게 준비할 것은 없어서
명절이라고 해도 별로 힘든건 없다.
그나마 준비하던 부침개 종류도 나혼자 음식 하는 게 맘에 걸린다고
큰동서가 모듬으로 사오겠다고, 제발 이제부턴 좀 편히 살라고
신신당부를 한 터라 반찬만 좀 더 신경써서 하면 되니까.
힘좋은 팔뚝으로 막대걸레질도 하라고 시켰더니 '내일 할게','이따 저녁에 할게'
계속 미루다가 결국 싫은 소리가 나오자 "에이~치사해죽겠네.별것도 아닌 걸
왜 사람을 못 살게 굴어? 요즘 왜 그런지 모르겠네"
"별것도 아니니까 해애...나보다 힘도 세면서..."
데모를 하느라 남편은 걸레를 딱 한 번 빨아가지고 거실, 안방, 작은방
세 개나 한꺼번에 다 닦았다.
"걸레 안 빨고 계속 닦아?"
"잔소리 해?그럼 나 안할거얏"
"....."
닦던 걸레로 또 닦아서 먼지를 문질러 놓으면 어떤가? 저 사람이 생전 처음으로
청소라는 걸 하는데...두 눈 질끈 감고 그냥 봐줬다.
내가 다림질 하는 동안 남편이 걸레질 하고, 내가 설거지 하고 있는 동안
남편이 빨래를 널고, 어쩌다 한번씩은 설거지도 하고 현관에 분리수거할 것들을 잔뜩
쌓아놓고 나는 강아지 데리고 출근해야 하니까 가져다 분리수거 하라면
자기가 강아지 데려온 죄로 어쩔 수 없이 한다.
이제 술을 끊었으니까 시골에 오고가는 운전대도 남편에게 전적으로 맡겼더니 세상 편하다.
늘 바빠서 허둥지둥 하면서도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는데 요즘 같아선 정말 살겠다.
명절을 쇠고나도 별로 힘도 안든다.
왜 진작 이렇게 살지 못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