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에 나는 돈을 초월한 사람처럼 살았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나는 주로 문학서적만 읽고
연극이나 연주회 같은 데만 찾아다니면서 나름대로 우아하게(?) 살려고 했던 것같다.
돈은 그냥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아끼며 알뜰하게만 살면 되는 줄 알았고
재테크 같은 돈불리기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남편을 만나 연애를 하게 됐는데
이 사람은 대놓고 돈을 좋아하고 어떻게 해서 많은 돈을 벌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무척
많은 사람이었다.
그 게 또 나에겐 의외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24시간 돈 벌 궁리만 하며 사는 사람도 있구나 신기하기도 하고
이런 사람이랑 살면 나중에 나는 그야말로 우아하게 돈쓰는 낙으로 살 수 있겠다
싶었는지도 모르겠다.ㅎ
돈을 많이 벌면 나누며 구제하며 살겠다는 취지도 좋아보였고
왠지 남달라 보였다.
남편은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이었지만 본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자수성가할 그릇이라면
집안배경 따윈 전혀 문제가 될 게 없겠다고 판단해서 다 쓰러져가는 시집을 보고도
별 근심없이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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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남편 직장을 따라 타지에서 단칸셋방에 신접살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곧바로 첫아이가 태어나고 또 연이어 둘째가 태어나고 보니 그게 말처럼 간단한 게 아니었다.
그 때서야 어지간히 기반이 좀 있는 남잘 만났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몰라서
없어도 이렇게 없는 집안에 시집을 왔구나 싶어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크게 내색은 하지 않고 그냥 우리 능력 범위내에서 알뜰살뜰 열심히 살았는데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한 일들이 많았다.
잘 입힐 수도 잘 먹일 수도 없고 잘 가르치고 싶어도 마음 뿐...
좀 더 기반을 잡은 후에 결혼을 하든지, 결혼후에도 좀 더 경제적으로 안정된 이후에
아이들을 낳았어야 했는데....이렇게 아무 생각없는 부모를 만나 우리 애들이 어려서
남들은 안 하는 고생을 좀 했다.
그래도 다 나쁜 것만은 아니어서, 가난이 뭔지 알고 지금도 잔 돈 한 푼을 허투로
쓰는 법이 없으니 한 가지는 제대로 배운 셈이다.
맨주먹으로 시작해 남의 땅에다 농사를 짓고 많은 도지를 내면서도 한 푼 두 푼 모아서
땅을 사모으고 그렇게 정직하게 재산을 일군 우리 부모님을 보고 자라면서 내가 배운 거라곤
그저 알뜰하게 사는 길 뿐이어서 나는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최대한 절약하며 살았는데
뻔한 월급에, 시부모는 돈 달라고 아우성이고 도무지 형편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것은,
무슨 근거인지 시어머니는 맏아들인 내남편이 언젠간 큰 부자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우리가 이미 부자가 된 것처럼 행동했다.
자식이 부모 부양하는건 마땅한 일이고 너희는 앞으로 잘 살 거니까 키운 값 내놓으란 식으로.
시어머니는 아들을 앉혀놓고 너희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하면서 밥상머리 교육,
아니 세뇌를 평생 시킨 분인데 아들이 그 말을 너무 잘 듣는 것도 문제였다.
자식 잘 되길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으니까 아들이 어머니 말 잘 들어서 나쁠 게 뭐 있을까?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우리 시어머니는 큰아들이 장차 부자가 될텐데 며느리만
호강하게 될까봐 굉장히 두려워했던 것같다.
그래서 아들에게 돈을 절약하는 법, 모으는 법이 아닌 쓰는 법부터 가르쳤다.
아주 비싼 물건을 사드려야 좋아했고 현찰도 웬만큼 드려서는 성에 차지 않아했다.
아들이 돈을 쓰면 쓸수록 흐뭇해했고 그러지 않으면 며느리인 나 때문이라고 미워했다.
며느리가 통이 크지 못 하고 쩨쩨해서 그렇다고.
나는 맏이인 우리가 어서 기반을 잡아야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나혼자만의 의지로
가능한 게 아니었다.
어느 정도 시댁과 남편의 협조가 있어야 하는데 남편은 마음 여린 효자라
부모 말을 절대로 거역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월급생활을 할 때 나는 매달 받는 월급을 남편이 쓸 만큼 덜어낸 뒤에 받았고
덜어낸 돈은 자기 술값과 효도를 위해 쓰였다.
명절이나 휴가 때 주는 보너스도 한 번도 내손에 받아보질 못했다.
고스란히 시부모와 남편 차지였다.
보너스라는게 월급생활자들이 평소에 모자랐던 생활비를 충당하란 뜻도 있는건데..ㅠ
이미 생각이 그렇게 굳어진 채로 삼십년을 나고 자란 사람이라
내가 아무리 베갯머리 송사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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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남편이 드디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초반에만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을 뿐
잘 되는 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돈을 잘 벌어들여도 관리를 잘 못 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쪽에서는 돈을 버는데 한 쪽에서는 수울술~ 새고 있었던 것이다.
시부모의 요구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시어머니의 허영심은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았다.
자식이 힘들게 번 돈을 그렇게 쉽게 써버리다니....평생 가난하게 산 한을 아들에게서 다 풀려는 것같았다.
그러다보니 소문이 나서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친척들까지 나서서
너희 사업 잘 된다며?우리 해외여행 좀 보내다오~이러고 달려들었다.
그 해외여행 보내드리기 전에 사업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지만.
맨손으로 시작해 아직 한참 더 노력해야 하는 우리에게 그렇게 덕 보자고 달려드는
사람들 뿐이었으니 잘 될 턱이 있나?
점점 더 욕심이 생겨서 사세 확장을 하느라고 무리하게 빚을 얻었던 게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이유였다.
남편도 잘 나갈 때는 겁이 없었던 것같다.
평생 그렇게 잘 될 줄만 알았던지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있으면 있는대로 다 써버렸다.
수익은 개발비로 재투자하고 남들처럼 부동산투자 같은 것도 별로 하지 않았다.
주변사람들에게 술값으로 엄청 인심을 썼고,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효도를 했고,
누구 도와주는 것도 워낙 좋아해서 테도 안나게 많이 베풀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왕 망할 거였다면 남 돕기라도 한 게 남는 거였다는 생각도 드는데ㅋ
그 당시엔 정말 나혼자 가슴이 답답했다.
앞으로 아이들 키우고 가르치며 살아야하는데 나만 종종거리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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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때까지 재테크라는 단어 자체가 모험이 필요하고 위험부담이 큰 것인 줄만 알고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은행적금만 부었다.
남편은 사업이 아무리 승승장구해도 우리나라 일반근로자들 평균임금에도 못 미치는 액수만을
내게 생활비로 주었고 난 아이들 교육은 백년지대계니까 책 사는 돈, 학습지 시키는 돈을 우선 쓰고나면
나머지는 거의 다 고스란히 모았다.
나머지 생활비는 내가 틈틈이 버는 것으로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대로 나중에 빚잔치 할 때 다 긁어모아보니
내가 그렇게 조금씩 모은 돈이 몇 년만에 수천만원(1억 가까이)이나 되어서 요긴하게 잘 썼다.
종잣돈만 모으면 돈이 돈을 번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았다.
처음엔 자꾸 생각잖은 일이 벌어지곤 해서 종잣돈 모으기가 쉽지 않았는데
1천만원을 목표로 하고 다시 5천만원을 목표로 하고....그렇게 차츰 목표를 높이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된 것이다.
남편도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내가 그렇게 큰 돈을 모아놓았을 줄은 몰랐을테니까.
그 돈을 내주머니에 비상금으로 꿍쳐놓지 왜 다 내놨냐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긴한데
그 덕분에 빚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고, 남편의 확실한 신뢰를 얻었으니
큰 후회는 없다. 돈은 또 다시 벌면 되고.
내가 자기보다 어리고 어리숙해서 뭘 알랴?했었는데 이젠 내말에 귀를 기울여
평생 절약이라는 걸 모르고 살던 자기 습관을 서서히 고치기 시작했다.
전에는 돈 좀 아껴쓰라고 잔소리하면 그깟 잔돈푼 아껴서 언제 부자되겠느냐고,
큰돈을 벌어들이면 되지. 했었는데 [티끌모아 태산]을 주장하고 실천한 내 말에 수긍하게
되었으니 그게 큰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내가 자라면서 배운건 절약 밖에 없다.
치약도 아껴서 굵은 소금으로 이 닦고, 샴푸도 안 사고 빨랫비누, 세숫비누로 감고,
다림질도 절대 허락이 안돼서 빨래를 말릴 때 아예 구겨지지 않게 널어야했고,
물이나 전기를 아껴야했던건 두 말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게 그 땐 궁상 떠는 것같아 그렇게 싫었는데, 싫어하면서 닮는다더니 나도 조금쯤은 닮았다.
그 때 잔소리 듣기가 너무 싫었던 나는 애들에게는 그런 잔소리를 전혀 하지 않고 나혼자 실천했는데도
내 뒷모습을 보고 배웠는지 아니면 가난이 자연스럽게 가르쳐줬는지 우리 애들은 엄청 짠돌이 짠순이가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배우는 게 참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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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재테크]라는 단어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완전히 바닥에 내려가고 난
뒤였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고, 또 진작에 알았더라도
별 뾰족한 수는 없었을거다. 부부가 생각이 같고 손발이 맞아야 되는데 너무나 달랐으니...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나는 그 말을 참 좋아한다.
모든 일에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릴적부터 돈을 많이 버는 게 꿈(?)인 아들이 군대에 갈 때 주변사람들에게서 받은 얼마간의 용돈을
불려달라면서 내게 맡기고 갔는데 그 후 매달 받는 쥐꼬리만한 사병월급과 가끔 있는 훈련수당까지
고스란히 내게 맡겼다.
자식이 맡긴 돈은 참으로 커보였다. 그 돈이 어떻게 번 돈인데?ㅠ 목 말라도 음료수 한 잔 안 사먹고
배고파도 군것질 한 번 안하고, 힘든 훈련 다 견뎌서 받은 돈인데...내 어깨가 무겁지 않을 수 없었다.
-실은 눈물나게 아꼈다기보다 단걸 싫어해서 원래 밥 세 끼 이외에 군것질을 안한다.
난 이 돈을 제말대로 절대 까먹지 말고 잘 불려줘야할텐데 어떡하면 좋을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생전 펴보지도 않던 경제신문을 읽으면서 한편으론 도서관에 가서 경제서를 찾아서 읽었다.
그랬더니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폭을 좁혀서 말로만 듣던 펀드와 주식에 대해 연구를 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초보인 나는 직접 투자는 무리일 것같아 적립식펀드를 다시 연구하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펀드의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가서 막차 타는 거라고들 했고 실제로 주변사람들은
손해를 보고 해지하기도 했다.
그래도 책대로라면 적립식은 거치식보다 훨씬 안전해보여서 그에 관한 전문가의 지침서를
세 권을 읽고나서 직접 인터넷 상에서 투자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선 괜찮아 보이는 종목을 몇 개 골라놓고(운영하는 회사, 운영자,경력 등을 감안해서)
거기서 그간의 운영수익률을 비교하면서 하나씩 지워나가니까 결국엔 한 종목이 남았다.
전문가의 지시대로 은행이자율보다 약간 높은 정도에서 무리하지않게 목표를 잡았다.
아무리 이율을 많이 낸 종목이라도 등락폭이 너무 크면 위험하다는 뜻.
특히 해외펀드는 아무리 전망이 좋아도 함부로 택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인데
마진을 많이 내더라도 환율변동에 또 영향을 받아서 마이너스가 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국내펀드를 택하더라도 직접투자하는 펀드매니저는 해외투자를 하지만
전문가니까 그들에게 맡길 일이다. 우리는 그 비중만 확인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또 몇 날 며칠 고민을 하다가 가입을 했다.
인터넷상에서 가입하는건 의외로 참 간단해서 인터넷뱅킹만 할 줄 알면 전혀 어려울 게 없다.
직접 은행 창구에 가서 가입하는 것보다 수수료도 적고 남의 말에 흔들릴 필요도 없고
간섭받을 필요가 없다.
대신에 위험도 내가 고스란히 감당해야하니까 초보에겐 약간 두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원할 때 더 입금할 수도 있고 가입 후 90일 넘어서는 약간의 수수료만 감당하면
해지도 언제나 가능하고. 의외로 수수료 비중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조심스레 돌다리를 두드려 시도했던 최초의 나의 재테크는 성공이었다.
덕분에 아들에게서 엄마 참 기특하다고 칭찬도 들었다.ㅎ
겨우 2년만에 이자가 거금(?) 50만원이나 붙어서, 전역한 아들에게 뚝 떼주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재테크가 뭔지도 몰랐던 내가 혼자 한 첫번째 시도에서 큰 자신감을 얻게 되어
지금은 틈틈이 재테크서를 찾아보게 되고 경제신문도 자주 들여다 보곤한다.
가장 안전하게 차근차근 돈을 불리는 방법을 연구하는 재미도 나름 쏠쏠하다.
지금 내가 가진 게 얼마 없어서 방법을 알아도 크게 쓰일 곳은 없지만
내가 잘 알아뒀다가 우리애들에게 조금씩이라도 잘 전수하고 싶다.
물려줄 유산이 없는대신 물고기 잡는 법을 전수한다고나 할까?
아들은 워낙 돈에 관심이 많고, 딸은 전공이 경영학이니 어찌됐든 경제에 관해서 공부를 해야하기에
엄마가 조금이라도 더 알고 있어서 나쁠건 없을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