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자를 받고나서 오후 내내 기분이 좀 그랬다.
잠을 좀 청해보려 누워도, 부엌에서 일을 해도, 그 문자의 내용이 머릿속을 맴도니말이다.
철옹성같이 자신의 성곽속에서 자신들만의 안위를 위하여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 아닌가.
난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모두는 돌다리를 건너야하는데, 누구는 몇개의 돌다리를 건너자마자 발을 헛딛어
물속으로 곤두박질 칠 수도 있고, 또 누구는 아슬아슬하게도 끝까지 무사히 건널수도 있다.
또는 거의 다 건너갔나싶은데, 마지막 돌다리에서 앗차할 수도 있는것이다.
난,,, 첫 돌다리부터 휘청휘청대기 시작하여 중간에서는 빠져서 허우적도 거려봤고, 먼저 건너간
이들에게 불쌍한표정을 지어보이며, 좀 쳐다봐주기를 원하기도 했으며, 흠뻑젖은 몰골이라도
억지로 일어나 겨우겨우 기다시피 돌다리를 건너고 있는중이긴 하다.
그러나, 첨부터 아무런 실수없이 앞서 건너던 이들은, 뒤돌아보며 안도감을 갖는것이다.
혹여라도 자신들의 옷자락이라도 부여잡을까봐 겁먹은 얼굴로 더욱 속력을 내어 건너갈 수
밖에 없는것이지.
그러나 이 인생이라는 것이 정답이 있는가?
돌다리 몇개남겨놓고 보기좋게 물속으로 엉덩방아를 찧던, 아니면 제대로 풍덩 빠지던,
다 건너기전엔 아무도 장담을 할 수없으니 말이다.
지금 내 심정이 그렇다.
난 내 오빠가 보낸 문자를 읽어보고, 또 읽어보며 만감이 교차하는걸 막을 수가 없는것이다.
<현승어멈, 보령이 애비다.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우리는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생각지도 못한 끔찍하고 고통스런일을 당하여 보령엄마는
그 충격으로 신경손상 바이러스까지 침투하여 거의 반신불수까지 갔다가 아직 치료중에 있고
나 또한 있는 이까지 거의 다 빠지고 몸무게가 10키로이상 빠지고 집안이 거의 공황상태이다.
정말 암흑의 터널안에 있는것같다. 너의 식구도 아무쪼록 마음 다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기원한다...>
이것이 내가 받은 문자의 전문이다.
쌩뚱맞다.
도대체 무슨일이 있기에 이런 처절한 문자를 내게 보냈을까?
일년반전에 - 정확히 15개월전에 - 내게 보낸 또다른 문자를 보낸뒤였다.
난 솔직히 이 사람을 내 가족? 내 형제라고 이젠 생각하지않기로 했었다.
자신의 밑으로 네명의 동생들을 짐스러워하고, 아직도 살아계신 자신의 부모와도
인연을 끊겠다고 부처님게 고했다는 이 사람이 어떻게 내 형제란 말인가.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안에서 성장했고, 장남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태어나, 모든형제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고 자랐으며, 스무살이 되기전부터 독립해 생활을 하여, 지금까지 자신의 성곽에서
잘먹고 잘살아오지않았는가말이다.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일년에 두어번 올라오는게 전부였고, 부모님이나 형제들의 안부를 묻는일도
없었을뿐 아니라, 살아오면서 어쩌다 집안일로 소환이라도 할적이면 싫은 내색 고스란히 보이고,
그렇게 그렇게 인생 편하게 살아오지않았는가말이다.
이 사람이 꿈꿔온 부모상이 따로 있었나?
이 사람이 바라던 형제상이 따로 있었나?
이 사람은 부모가 자신의 대학뒷바라지를 어떻게 했을까 생각은 해보았을까?
밑으로 네명의 동생도 먹이고,입히고, 가르쳐야했기때문에 항상 빠듯한 살림살이였다는걸
알기나 했을까?
국민학생이던 난, 엄마를 따라 전당포라는곳엘 자주 갔었다.
엄마는 오빠에게 보낼돈을 마련하느라 늘 동분서주했었다.
이 남자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회사를 들어갔고, 바로 여자를 사귀어 임신을 시켜버렸다.
그리고는 < ....이 문제로 나를 안볼꺼면 나도 그럴 의향이 있으니, 한국땅 어딘가 자식하나
살고있다는것만 기억하시라......>라는 짧은 편지를 보냈었다.
한 집안의 장남이라는 남자가 말이다.
장남으로 태어난다는건 오다가다 줄을 잘못서서 재수없게 태어났을뿐이라고만 생각했을까?
옛날부모들이 거의 그렇듯, 장남은 장남으로 키운다.
이 말은, 모든 우선순위는 장남에게 있었고, 밑의 동생들은 그걸 당연하게 알며 자랐다.
그런데, 이렇게 자란 이 남자는 그 모든게 너무도 당연한것을 넘어, 그것조차도 불만이었다.
"난, 18세이전꺼는 하나도 기억이 안나...... "
이러면서 유아독존적인 발언을 하곤했다.
난, 내 부모가 이 장남에게 쏟아부운 열정과 관심과 기대의 십분의 일이라도 내게 주었더라도
지금 내가 처해있는 이 상황에 대해 일절 원망이나 불만을 갖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떼놈이 가져간다는 말이 딱 내게 어울리니 울화가 치미는건 나도 인간
인지라 너무도 당연한거 아닌가.
이 남자는 임신5개월의 여자와 결혼식도 제대로 올렸다.
회사가 지방이라 내 부모는 버스까지 대절하여 친치들을 불러모아 새벽부터 내려가서
결혼식을 했다.
그리곤 그들은 그렇게 독립이란걸 해버린거다.
그뒤로...
이 남자는 자신의 가정이 이제 아닌 남의 가정(자기가 태어나고 자란)일엔 아무런 관심도
없다.
호적상의 부모자식이란게 아마도 왠수같진않았을까?
차라리 고아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혼자 고뇌하진않았을까?
이 남자는 일년에 두번 부모집에 오는걸 숙제하듯 했다.
그렇게 그렇게 세월은 착실하게도 흘러갔다.
그러면,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래도 장남이라 맘적으로 기대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까?
집안에 소소한 일이라도 생길때마다 이 장남이 달려와주길 바라는 맘이 없었을까?
너무나 쌩~하니 냉정해져버린 장남을 볼때마다 부모의 맘은 어땟을까?
그러니, 당연 일년에 두번 마주한 부모와 장남사이는 얼음계곡이나 다름이 없었다.
쉽게 말도 못붙이겠끔 싸늘한 장남과 자신을 거리두는것같은 부모.
이 남자는 엄마에게 큰 죄를 지었다는걸 알기라도 할까?
자기를 낳은거자체가 죄라며 속으로 큰소리치는건 아닐까?
이 남자는 절에 열심히도 다녔었다. 갖다바친 돈도 어마어마하리라.
절에 가서 봉사도 어마어마하게 했으리라.
이 남자는 자신의 부모의 늙어감조차 아주 부담스러워했다.
자신에게 손벌리는 부모도 아니고 우리를 모시라는 부모도 아니었다.
냉랭하기 짝이없는 그 모습에 내엄마는 고개를 흔들뿐이었다.
"..네큰오빠랑은 같이 살자해도 못산다. 꽁~해가지고 가슴이 다 막혀 죽을꺼다.."
말은 이리해도 엄마는 늘 장남을 그리워한듯하다.
나도 아이를 낳고 키우지만 첫정이라는게 있다.
큰며느리인 이 남자의 마누라역시 부창부수이다.
아마 속으로 '야호~'를 많이도 외치며 살았을것이다.
과거 황무지같았던 울산촌구석에서, 그저, 농사꾼의 아내로 평생을 등허리한번 편히
펴보지못하게 살아갔을 울산아가씨들.......
울산이 산업도시로 되어버려, 어느날 갑자기 물밀듯 쏟아져내려온 서울의 고학력자들.
그들을 잡아 남편으로 만들고자 여기저기서 기웃기웃거려댔었다지아마..
내부모역시 큰며느리를 달가와하지는않았다.
지금으로부터 삼십몇년전이라면 여자가 몸을 함부로 돌려먹어 애를 가졌다는건 욕을먹어
마땅한 일이었다.
그렇게그렇게 결혼까지 시켰을적엔 이 여자역시 보은(?)의 마음을 가져야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해서 내 부모가 면전에 대고 싫은소리한번 하지않았는데, 어떻게 큰며느리가 되어
갖고, 자신이 해야할 도리를 집어던질 수가 있는가?
그것도 남편의 핑계만 대면서 말이지.
그렇다고 시누들이나 시동생들이 험한인간들도 아니고, 만날기회도 없으니 이야기조차
할 기회도 없고, 편하디편한 며느리의 삶이 아니던가말이다.
누구하나 태클거는이 없이, 자신들의 가정에서 희희낙락하며 잘 살아가지않았던가.
이 남자는 그래도 엄마의 치성과 관심과 기대속에 자란지라 별 우환없이 잘 살아갔는데
어찌되었건, 하늘과 땅이 있어, 이 인간들의 심뽀를 지켜보고 있었나보다.
부모가 늙어가도 문안은 커녕 언젠가부터는 발도 끊어버린다.
재작년 아버지의 두번째 대장암수술때.
난 가슴이 아팠다.
병원에서는 85세의 고령인 아버지의 수술이 혹여 임종이 될수도 있다며
모든 식구들을 소환했었다.
그러자 정작 수술방을 지킨이는 다섯자식이 아니고 사위혼자였다.
수술전날 울산에 전화를 했더니, 큰며느리는 기고만장한 목소리로
"오빠 자는데~ 낼아침에 말해줄께~"
임종이 될수도 있다는 대수술이 있다는데 뉘집개가 똥쌌냐는 투였다.
그리고는
수술날 낮에 내게 보낸 문자.....
<네가 전화했다는거 들었다
부모의 일은 부모가 감내해야할 일이다
난 부모자식간의 인연을 끊기로 부처님께 고했다..>
내친구는 나보다 더 흥분하여, 이것들을 가만두냐며 날뛴다.
자기같으면 도끼라도 들고가서 다 때려엎던가, 불을 싸지른다며....
아무튼 저 문자를 내게 보낸뒤 정확히 15개월만에 보낸 문자.
네놈은 안늙을줄 알았냐며 고함이라도 쳐주고 싶었다.
네놈도 네 자식들한테 똑같이 당해야한다고 소리치고싶었다.
항상 "늙으면 빨리빨리 죽어야해!!"를 수도없이 외치곤하던 그인간.
그도 별수없이 60세가 되었다. 왜..늙으면 빨리빨리 죽어야한다며
본인은 그러기싫은가보지?
그리고
내가 서른쯔음에 결혼할때
큰며느리가 이죽대곤했었다
"어휴~ 고모는 어떻게한대? 내는 스무다섯에 둘째까지 낳고 끝냈는데~
고모는 언제 얼라낳고 키운대? ㅋㅋ 내가 고모나이였을때 학부모였다아이가!ㅋㅋ"
남의 아픔에 소금뿌리는 인간들......
난 그들에게 아무런 응징을 하지않았다
그들에게 응징할수있는 이는 조물주이지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의 어설픈 응징으로 그들의 죄가 가벼워지는걸 원치않았다.
그리고
내 남편감에게 쏟아지는 멸시어린 말들....
"어휴~ 고모학벌이 아깝다 아까워..내가 다 화가 난다아이가!"
그래?
네들도 딸을 둘을 키우지.....
시골에서 공장다니다가 농사꾼마누라로 평생 허리못필인생이 인생역전하다보니
모든게 아주 쉬워보였나보지?
그런 네가 그럴듯한 서방만나 평생 십원한장 안벌고, 집에서 농땡농땡..서방이
벌어다준돈으로 낮엔 친구들만나 맛난거 사먹으러다니고, 철마다 백화점에서
옷이며 가방이며 사입는 주제였는데, 네 주제보다 훨~씬 나은 네들 딸들 - 네가
안나온 대학도 나왔고, 너한번 못밟아본 미국에서 어학연수까지 받은 - 은
네 서방보다 훨씬.아니 훨훨훨씬 나은 서방을 만나야 형평성에 맞다고 생각하며
애들을 키웠겠지......
내가보기엔 네 딸들이 가져야할복까지 네년이 다 가져다썼다고 본다.
아니, 적어도, 네 삶을 들여다보며 감사하다는 생각을 쥐꼬리만큼이라도 가지며
살았었어도 오늘날 네 딸들이 겪어야할 고모들의 삶보다 더한 고통은 없었으리라고
본다.
어떻게 그 입에서 "..내가 화난데이,, 내 친구들중에서 내가 제일로 시집을 못갔다
아이가...내 참말로.." 이건 복을 터는 말이다.
그러면 울산촌구석 네 친구년들은 하나같이 의사,판사, 교수. 장관들과 결혼을
했다는 말이네..... ㅎㅎ 웃음밖에 안나온다.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있으니, 신이 네 딸에게 줄 복을 거두어가지..
몇년전 이 집 큰딸이 의사와의 혼담이 있었다.
무려 9살이 차이가 나지만, 아주 괜찮은 혼처였다.
남자나이가 39세라서 그런거빼고는 복이 넝쿨채 굴러들어온것이었다.
근데 이 엄마라는 여자가, 제딸의나이가 서른살인게 열일곱으로 인지되었는지
나이차이가 그리나니, 집한채를 사갖고 와야한다며 큰소리를 뻥뻥쳐댔다고 했다.
물론 혼사는 깨졌다.
내친구도 과거에 9살차이나는 의사랑 결혼하면서 아파트전세까지 들고갔었던 기억이난다
거기다가 그 의사는 재혼자리였었다......
그런데 도대체 뭘 믿고? 그렇다고 즈그딸이 양귀비뒷다리정도의 미모인가?
키가큰가? 학벌이 좋은가? 벌어놓은 돈이 많은가? 부모가 재력이 있나?
아버지가 뭐래도 되나? 이 모든게 "아니오"인데..
내조카들과는 난 아무런 이해관계에 얽혀있지않다.
어렸을땐 첫조카여서 엄청 예뻐라했었다.
얘네들이 잘돼고 못돼고에 관여하고싶은 생각도 없다.
그런데 얘네들 나이 34살, 32살. 하나는 돌싱,하나는 노처녀.
얘네엄마 내게 상처주며한말처럼 " 보래이 고모야. 내 고모나이땐 학부모였다아이가"
근데,,, 그런 나역시 34살엔 나도 학부모였다. 유치원생학부모.
자식키우면서 남의 자식 흉보는게 아니다.
삼신할머니가 있기때문이다.
삼신할머니는 모든 신들의 으뜸이다.
내큰오빠내외땜에 항상 화가 치밀어오르는걸 억지로 참고살고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하늘과 땅의 응징을 받고있는건 확실하다.
그들이 자초한것이다.
부처님믿는다며 발바닥이 닳도록 절에는 뭐하러 다녔는지....
부처님앞에 자신의 공덕을 고해바쳐도 몇억겁이 죄인데 하물며
자기를 낳은 부모와 자식간의 인연을 끊겠노라며 부처님앞에 고한다는건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넘기는 일이라는걸 모르고 한짓인지?
쯧쯧쯧....내 엄마는 모자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자신이 모자란지도
모르며 60평생을 살아온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