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 속 보이네
“물에 부른 쌀이 없어서 아직 밥 못 안쳤는데.”
주말이라고 영감이 집에 있으니 점심을 챙겨 줘야겠다. 모처럼 양처(良妻) 노릇을 좀 하자 하고 이층에 올라 주방으로 향하니, 영감이 잽싸게 내 앞을 가로질러 먼저 주방으로 들며 하는 말이다. 천상 놀고먹는 주부가 배고픈 영감의 눈치를 살피는 심상이다.
‘부른 쌀이 있었는데.’싶어서 냉장고 문을 여니 점심 한 끼니로는 충분하겠다. 솥에 불을 당기고 식탁 앞에 앉으니 그새 세탁기를 돌렸는지 딸꾹질을 하며 다 돌아갔다는 신호를 한다. 영감이 급히 수도꼭지를 잠그고 세탁기 문을 열어 빨래를 빼낸다. 이젠 제법 익숙한 솜씨다. 좀 더 일찌감치 일러주고 부려먹을 것을 그랬나 싶다 ㅎㅎㅎ.
“여보. 당신 내가 돈을 버니까 무지 좋은가 보네?!”
빨래를 빼내던 손이 멈춘다. 돌아앉은 그이의 눈매가 매섭게 빛난다. 수십 년 전의 친정엄마 생각이 난다. 신혼에 신랑과 다투고 친정으로 줄행랑을 했겠다?! 내가 푸념을 할 사이도 없이 뒤따라 들어선 그이의 눈매를 보고 후일, 엄마는 무서워서 벌벌 떨리더라 하셨던가?!
친정집 대문을 나서는 우리 부부를 보내고는, 엄마는 숱한 밤을 지새웠다고도 하셨지. 전화가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아마 그이의 눈매가 시방 같았나 보다. 남정네라고는 아버지 밖에 모랐고, 그 아버지에게서 이 막내딸이 질투를 할 정도로 사랑만 받고 사신 엄마는,
“암말도 말고 살어. 우서방이나 하니께 데리러 왔지.”라고 하셨다.
친정엄마를 생각하며,
“아. 내가 말을 잘못했나?!”하자, 목에 잔뜩 힘을 주었던 그이가 목의 힘을 뺀다.
“도대체 얼마나 벌길래. 나, 이젠 안 벌어도 될 만하나?”한다. 그러나,
“그럼 왜 안하던 일을 하는데?”소리는 못한다. ‘그럼. 안 도와주지.’하면 나만 손해니까.
가게라고 열었으니 손님이 있거나 없거나 제 시간에 문을 열어야 한다. 게으른 가게는 오가는 이들에게 구설거리가 되니까. 셔터를 내리는 시간도 장사가 되거나 말거나 그래도 제 시간은 지켜야 모양새가 좋은 법이다. 낮에도 할 일 없이 멍청이 앉아 있는 건 더 볼품이 없다. 바쁜 척은 아니어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게 내 적성에 맞다. 그러자니 심신이 고달프다.
밤잠이 오지 않는다는 투정도 옛 말이고 자는 동안 서너 번씩 일어나서 배고프다던 일도 먼 사치가 됐다. 씻고 드러누우면 눈이 감기고 그 눈을 뜨면 구수하게 아침밥 익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손님이 찾는 것도 아닌데 윗층에 있으면 아래층이 궁금해서 뛰어나가기 일쑤다. 살령 내려가서 딱히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지.
그동안 편하게 산 나도 변했지만, 암튼 영감도 많이 변했다. 작은 사업이지만 ‘오너’라, 영감의 늦은 출근을 나무라는 사람은 없다. 남은 설거지는 자연스럽게 영감의 몫이다. 젊은 나이에는 지독스럽게도 자존심을 새우더니 그 억새 빠진 자존심은 어디로 다 보냈는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시어머님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오실까봐 겁이 난다. 내 머리 체라도 잡으실 걸?!
보림아~!
할아버지가 요상시럽구먼. 돌아가실 때가 되셨는감?! 상상도 못한 일이랑께. 사실 니 막내 고모 시집보내고는, 할아버지랑 대화가 없었시야. 싸운 사람맹쿠로 뭐, 할 말이 없었다니께. 진즉에 할아버지가 저러셨음 할미가 업구 다녔을 것이여. 아무래두 할미가 할아버지 수에 넘어간 거 아녀? 할아버지가 할미 가게 열기 전부텀,
“사무실 접을까부다.”하셨걸랑?! 할미가 속은 거 같여~.
까이것! 속았음 할아버지한티 살림 떠 맡기지, 뭐. 이라고 밥 얻어 먹는것두 괘않겄다아~ㅋㅋㅋ.
암튼 가게를 연 건 천 번이라도 잘한 일이여~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