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내 엄마 해라
서른여덟의 딸. 안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아직 미혼인 막내 딸년이다. 이 나이 되도록 선을 한 번도 안 봤다면 누가 곧이들을까. 소위 돈 좀 있는 집 아들들은 아버지의 재산이 제 것인 양 아는 그 알량한 인품이 싫고(부모의 덕에 누리는 풍요를 마치 제가 재벌인 양 착각을 한다고), 엄마 친구들의 소개는 부족한 딸년으로 인해서 엄마가 더 머리 썩일 것이라 안 되고(이건 순전히 본인이 시부모를 잘 모시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서 나온 소치라 한다). 얼굴 반반한 녀석도 싫다 한다(인물 좋은 녀석들은 한사코 그 인물값을 한다더라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걱정을 않는다.
“도대체 네 이상형은 어떤 녀석이야?” 물으면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을 한다.
“휠(feel)이 통해야 해요.” 허거~억! 코쟁이(?)를 불러다 줘야겠구먼.
“마음이 맞아야 해요.” 그건 살아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니 어쩌냐고 눈을 부라리는 어미에.
“취미생활을 같이 할 수 있으면 조~ㅎ은데.”
까맣게 타는 에미 속은 아랑곳하지 않고 농담처럼 내 뱉는다.
형제 중에 가장 야무지다고 방심을 했더니…. 허긴 어미에게도 문제는 있었겠다. 결혼을 아예 안한다는 ‘독신녀’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시랑 감을 골라 오랴 했던 게 사단인 게야. 다른 집 올드미스들은 히스테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데 내 딸년은 매일이 즐겁단다. 제가 시집을 가면 엄마가 심심할까봐 걱정스러워서 서두르질 못하겠다고도 한다. 컴이 말을 잘 안 들어도 엄마한테 불려가고 엄마 대신 은행대납도 해야 하고…. 칫! 컴은 나도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내가 쓸 만큼은 할 수 있고, 은행대납은 나가는 길에 겸사로 시켰거늘 제 주재에 누구 걱정을 해?!
엄마 걱정이 지나쳐 이제는 맡아놓은 소리꾼이 다 됐다. 결혼을 한 친구들을 만나고 온 날이면 딸년의 입이 더 바쁘다. 꼭 내 며느님의 대변인처럼 군다. 제가 언제부터 올케 편이었는고.
“요새 며느리들, 시어머니가 김치 해주는 거 안 좋아한대요. 오빠네 김치배달 그만 하세요.”
“아기 옷 사주고 싶으면 돈으로 주세요. 올케 맘에 드는 것으로 사 입히라고요.”
“뭐든지 아기 수준에 맞추지 말고 언니 수준에 맞춰주세요. 아기는 아직 뭘 모르니까.”
“아기 머리는 땋아주든 잘라주든 신경 쓰지 마세요. 제 엄마 맘대로 해주라고 놔둬요.”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그러나 나도 할 말은 있다.
“김치는 하는 김에 좀 더 해서 덜어주는 거지. 오빠가 어미 솜씨에 긴 세월 맛을 들였으니.”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은, 나도 예쁜 손녀딸 손잡고 자랑하며 쇼핑하는 재미도 좀 보자.”
“내가 명색이 오십 년 지기 베터랑 디자이너 출신이거늘, 안목이 며느님만 못할까.”
“눈물이 날 정도로 손녀가 보고 싶은 할미 속을 니들이 알기나 해? 유치원이 눈앞인데.”
“아기 꾸며놓는 게 영 맘에 안 들어. 난 아기 여섯을 길러낸 솜씬데.”
출근을 하는 아침. 바쁘다고 쩔쩔매면서도 딸아이는 할 말은 다 한다.
“혼자 자시기 싫다고 점심 거르지 마세요.”
“안과에서 낮잠 꼭 주무시라고 했죠? 잠이 오지 않으면 눈을 감고 쉬기라도 하세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퇴근길에 마트 들러올게요.”
“오늘 퇴근이 늦어요. 바로 헬스 갔다가 올 테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주무세요.”
“제 방에 제습기 엄마 방에 끌어다 놓으세요. 장마 통에 엄마 방도 꿉꿉하지요?”
보림아~. 니가 고모한테 말 좀 전혀라. 할미가 고모더러,
“니가 내 엄마 해라~!”했다구. 그라고 잊지 말고 덧 붙여라, 이젠 아무 녀석이라도 델고만 오믄, 할미는 ‘OK!’라고.
네 고모 좀 언능 쫓아내자 제~발.
근디 보림아.
고모가 시집가고나면 고모의 그 잔소리가 그립긴 할 겨. 그치?! 고것이 살갑기는 혀~. 그치?!